
▲ 누에 사육장에서 만난 윤성원 명인. 볼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4대째 이어온 양잠 농가의 하루를 말해준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는 살아 있는 것들이 내는 소리였다. 수만 마리의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였다.
9일 오후 1시 30분, 충남 서산시 고북면 면학골길에 있는 윤성원 명인의 누에 농장 '누에가'를 찾았다. 목적은 오디가 아니라 누에였다. 4대째 이어지고 있다는 양잠 농가의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다. 마침 농장에서는 오디 체험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것은 누에 농장을 이해하게 해주는 덤이었다.

▲ 서까래처럼 보이는 이 공간은 어린 누에를 키우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 누에는 성장 단계에 따라 이곳에서 더 넓은 사육장으로 옮겨진다.
농장에 도착하자 윤성원 명인은 가장 먼저 우리를 어린 누에를 키우는 방으로 안내했다. 바람이 솰솰 드나드는 방이었다. 천장 가까이에는 서까래처럼 보이는 나무 구조물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오래된 농가의 뼈대처럼 보였지만, 윤성원 누에 명인은 그곳이 어린 누에가 일정 기간 머무는 인큐베이터 같은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그 방에서 우리는 누에의 한살이를 들었다. 누에는 알에서 깨어나 뽕잎을 먹으며 자라고, 네 번 허물을 벗은 뒤 고치를 짓는다. 고치 속에서 번데기가 되고, 시간이 지나면 나방이 되어 다시 알을 낳는다. 교과서에서 본 적 있는 과정이었지만, 뽕나무밭 한가운데에서 직접 들으니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윤 명인은 누에 알이 1년에 한 번만 부화한다고 설명했다. 봄에 난 알은 다음 해 봄이 되어야 깨어난다. 온도를 맞춰준다고 해서 아무 때나 부화하는 것이 아니라, 겨울을 지나야 비로소 깨어날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에 알은 일정 기간 냉동 보관을 거친 뒤, 다시 냉장 상태로 옮겨 계절의 변화를 지나온 것처럼 관리한다. 사람의 손으로 겨울을 만들어주고, 다시 봄을 맞게 해주는 과정인 셈이다. 그렇게 시간을 통과한 알이 뽕잎이 나오는 시기에 맞춰 깨어난다.
누에의 시간은 사람 마음대로 당기거나 늦출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계절과 뽕잎, 온도와 사람의 손길이 맞아야 비로소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홈매트도 안 됩니다"

▲ 뽕가지 사이를 가득 메운 누에들. 몸집이 커질수록 누에들이 서로 포개지지 않도록 사육 공간을 넓혀주는 ‘확좌’ 작업이 이어진다.
누에의 한살이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그는 누에들이 있는 농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조금 전에 들은 말이 생각났다.
"홈매트도 안 됩니다."
누에는 사람이 만든 유기합성 물질에 매우 약하다고 했다. 연막 소독이 한 번 지나가면 그해 뽕잎은 1년 내내 사용할 수 없다. 홈매트나 방향제, 향수 같은 휘발성 화학물질도 누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사소한 냄새와 약품이 누에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파리와 모기가 조금 많아도 감수한다. 누에가 살기 위해서는 사람이 불편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고보니 농장 안의 공기가 다르다. 작은 화학물질 하나에도 무너질 수 있는 조심스러운 공간. 누에 농장은 일반적인 곤충 사육장이 아니라, 아주 민감한 생명들이 살아가는 작은 생태계였다.
누에를 만져보니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농장 안으로 들어서자 긴 사육대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갓 베어 온 뽕잎과 가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하얀 누에들이 그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초록 뽕잎 사이로 하얀 몸을 드러낸 누에들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도망가지도, 흩어지지도 않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하얗고 길다라며 조금은 통통한 몸이 뽕잎 사이를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 정말 낯설었고 징그럽기까지 했다. 번데기조차 먹지 못하는 필자인지라 한참을 망설이다 손끝으로 살짝 만져봤다.
그런데 누에는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딱딱하거나 축축할 것이라는 예상은 틀렸다. 손끝에 닿은 감촉은 말랑하고 연했다. 내가 먼저 움찔했고, 누에는 오히려 가만히 있었다. 혹시 이 작은 생명이 내 손길에 놀라지는 않았을까.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윤성원 명인은 누에를 "처음부터 사람이 기르도록 만들어진 가축"이라고 표현했다.
"누에는 벌처럼 쏘지도 않고, 보호색도 없고, 도망도 가지 않습니다. 나방이 되어도 멀리 날지 못하고 활강만 하지요. 한 자리에서 크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는 생물. 누에는 사람의 손길과 뽕잎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 윤성원 명인 부부가 누에의 사육 공간을 넓혀주는 ‘확좌’ 작업을 하고 있다. 누에가 자랄수록 밥자리와 쉴 자리도 함께 넓혀줘야 한다.
반복으로 채워지는 누에 농사의 하루
윤 명인의 농장은 4대째 이어지는 양잠 농가다. 할머니와 아버지에 이어 그가 누에 농사를 짓고 있고, 아들도 농수산대학교를 나와 앞으로 가업을 이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뽕나무밭은 약 1만 5천 평 규모. 한때는 1년에 400상자까지 누에를 키웠지만, 지금은 규모를 줄여 보통 100상자 정도를 사육한다. 누에 한 상자는 약 2만 마리. 누에 농사는 1년에 두 차례, 뽕잎이 나는 시기에 맞춰 이뤄진다. 양잠은 결국 뽕나무의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농업이었다.
누에 농사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습도와 곰팡이. 비가 와서 뽕잎이 젖으면 예전에는 선풍기로 말렸지만, 요즘은 차라리 굶기는 편이 낫다고 했다. 젖은 잎을 먹고 병이 나는 것보다 잠시 굶기는 것이 낫다는 설명이었다. 농약과 연막 소독은 더 치명적이다. 한 번 노출되면 그해 뽕잎을 사용할 수 없다.
그제야 뽕잎이 단순한 먹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곳에서 뽕잎은 누에의 밥상이자 농장의 기반이며, 양잠이라는 오래된 농업을 떠받치는 시작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누에 밥 주고, 뽕 잘라오고, 다시 밥 주고. 계속 반복입니다."
사육장 한쪽에는 갓 베어 온 뽕가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 옆에서 윤성원 명인 부부는 빽빽하게 모여 있는 누에들의 자리를 넓혀주고 있었다. 자라난 누에들이 서로 포개지지 않고 뽕잎을 먹을 수 있도록, 뽕가지와 누에를 조심스럽게 펼쳐주는 일이었다. 양잠에서는 이를 '확좌'라고 한다. 누에가 커갈수록 밥자리도, 잠자리도 함께 넓어져야 했다.

▲ 햇빛을 받은 뽕잎 사이로 검붉게 익은 오디가 얼굴을 내밀었다. 누에에게는 밥이 되는 나무가, 사람에게는 달큰한 열매를 내어주고 있었다.
버릴 것이 없는 누에, 그리고 '식구'라는 고객
윤 명인은 누에가 고치가 되기 전 상태에서 주로 활용된다고 했다. 일부는 고치로 가고, 고치는 동충하초나 학교 체험용, 공예 재료 등으로 쓰인다. 고치를 잘라 꺼낸 번데기, 누에똥, 뽕잎차까지 버릴 것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는 누에 제품을 대형 유통망이나 제약회사에 맡기지 않는다. 고객에게 직접 보낸다. 그리고 그 고객을 '식구'라고 부른다.
"우리 고객, 우리 식구들한테 택배로 보내드리는 게 제 비즈니스입니다."
그에게 판매는 믿음과 신뢰였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가격 경쟁을 벌이는 방식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알고 신뢰하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했다. 농산물의 원가는 생산자가 가장 잘 아는데, 정작 가격은 도매시장에서 정해지는 현실도 불합리하다고 했다.
누에 농사는 그에게 전통 농업이면서 동시에 생산자가 직접 가치를 설명하고 고객을 만나는 비즈니스였다.
오디는 덤이었다
탐방이 끝날 무렵 뽕나무밭으로 나갔다. 검붉게 익은 오디가 가지마다 매달려 있었다. 햇빛을 받은 뽕잎은 넓고 선명했다. 잎 사이로 아직 붉은 오디와 까맣게 익은 오디가 함께 얼굴을 내밀었다.
잘 익은 오디를 손끝으로 따자 검붉은 물이 묻었다. 입 안에 넣으니 달큰한 맛이 퍼졌다. 사육장 안에서 누에가 먹던 바로 그 뽕잎이, 밖에서는 열매를 품고 있었다.
그제야 뽕나무가 다르게 보였다. 사람에게는 오디와 뽕잎차를 내어주고, 누에에게는 생명을 이어갈 잎을 내어주는 나무였다. 오디는 덤처럼 만났지만, 그 덕분에 양잠의 시작이 결국 뽕나무라는 사실이 더 또렷해졌다.

▲ 누에 사육장 안에는 긴 사육대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사육대마다 뽕잎이 수북했고, 그 아래로 수많은 누에들이 자라고 있었다.
사라지지 않게 보여주는 일
윤성원 명인은 어린이 체험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전에는 학교 교재용으로 누에가 많이 나갔지만, 요즘 아이들의 관심은 다른 체험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아이들에게 누에를 보여주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누에를 알려주지 않으면 10년 뒤에는 누에를 아는 소비자가 없어집니다. 누에를 아는 세대가 사라지면 양잠도 함께 사라질 수 있어요."
아차 싶었다. 사라지는 것은 산업만이 아니었다. 누에를 본 기억, 뽕잎을 만져본 감각, 사육장 안에서 들었던 사각사각한 소리도 함께 사라질 수 있었다.
빠르게 팔고,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 누에는 느리게 먹고, 사람은 반복해서 뽕을 나른다. 그 느린 시간 속에서 4대째 이어온 양잠이 아직 살아 있었다.
손에는 오디 물이 남았고, 귀에는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던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린다. 사라져가는 줄 알았던 양잠은 아직 누군가의 손끝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누에의 작은 입이 뽕잎을 갉는 소리 속에서, 느리게 느리게 살아 있었다.
* 취재일: 2026년 6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