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오기 전 유월의 햇살은 가장 담백하면서도 시원하다. 그늘과 양지의 경계가 칼처럼 또렷하고 마당의 흙은 발을 디딜 때마다 마른 소리를 내며 좋은 느낌을 부여해준다. 홍성 장곡면 산성리로 들어서는 길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길 한쪽을 덮고 느티나무가 다른 한쪽을 채워 한낮인데도 길의 절반은 서늘하다. 지난해 가을비 속에서 찾았던 이 집을 다시 여름에 찾아가본다. 비에 젖은 기와가 아니라 빛에 달궈진 고택을 보러 온 셈이다.

사운고택은 양주조씨 종가로 알려진 고택이다. 병자호란 무렵부터 이 마을 산성리에 자리를 잡은 집안으로 충정공 조계원의 후손이 대를 이어 살아왔다. 2013년에 이름이 홍성 조응식 가옥에서 사운고택으로 바뀌었으니 지금 부르는 이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들어가는 입구의 문은 얼방문이라 적혀 있다. 향석의 글씨를 새긴 검은 편액 아래 두꺼운 널문이 그늘을 한 겹 더 만든다. 얼방이라는 낯선 이름에는 이 마을의 내력이 담겨 있다. 백제가 무너진 뒤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과 부흥군이 한동안 의지했던 주류성이 이 집 뒤편 산자락에 비정되어 있고 그래서 옛 고을 이름이 얼방이었다고 전한다.

사운이라는 두 글자는 이 집안 한 어른의 호에서 왔다고 한다. 또 하나의 이름인 우화정은 꽃비가 내리는 정자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비가 꽃잎처럼 흩날린다는 그 발상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가을비를 맞으며 처음 이 이름을 새겼을 때와 달리 여름의 마른 마당에 서서 그 이름을 떠올리니 비의 자리를 햇빛이 대신 메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학성산성이라 불리는 그 성을 두고 학의 일본식 음과 주류라는 음의 닮음을 근거로 주류성을 비정한 연구가 이어져 왔다. 한 가문의 종가가 천 년도 더 된 패망한 왕조의 마지막 거점을 등지고 앉아 있는 셈이다.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발걸음은 역사의 한 층을 들추는 일이 된다.

문을 지나 안으로 들면 사랑채가 먼저 손님을 맞는다. 솟을대문 안쪽에서 올려다본 편액과 그 너머로 흘러내리는 기와의 곡선이 한 화면에 겹친다. 마당에는 가지를 낮게 드리운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굽은 줄기가 곧은 기둥들 사이에서 유난히 부드럽다. 마루는 비어 있고 댓돌 위에는 누군가 벗어둔 신발이 그대로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는 증거는 늘 이런 작은 흔적에서 드러난다. 삶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은 고택을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숨을 쉬는 공간으로 만든다.

여름의 마당을 걸으면 가을과는 다른 시간이 흐른다. 가을비가 모든 것을 가라앉혔다면 유월의 빛은 모든 것을 들어 올린다. 잔디는 막 깎여 결이 가지런하고 트랙터 한 대가 소나무 그늘에 들어가 한낮의 더위를 피하고 있다.

담장 너머로는 잘 손질된 정원이 넓게 펼쳐지고 화강암으로 새로 놓은 길과 흙길이 나란히 이어진다. 오래된 집과 새로 단장한 마당이 한자리에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걸으며 보니 그 또한 이 집이 시간을 견디는 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원 곳곳에는 시를 새긴 비가 서 있다. 복숭아 모양으로 다듬은 검은 돌에 빼곡히 새겨진 글자들은 한낮의 빛을 받아 음각의 골마다 그 의미를 만들어두었다. 잔디밭 끝에는 문학비가 또 하나 놓여 있다. 누군가의 말을 돌에 새겨 길가에 세워 두는 마음을 생각한다. 글은 사라지기 쉬운 것이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오래 남는 돌에 새긴 시는 읽는 이를 기다린다. 서로의 시간을 녹여낼 때 같은 기억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문장을 돌 앞에 서서 읽는 일은 그 사람의 시간 한 자락을 잠시 빌려 보는 일이다.

사운고택이 놓인 길은 내포문화숲길의 한 구간이기도 하다. 가야산 둘레의 네 시군이 옛길과 마을길과 숲길과 물길을 이어 만든 긴 도보길로 서산과 당진과 홍성과 예산을 지난다. 원효깨달음길과 천주교순례길과 백제부흥군길과 역사인물길과 동학길이라는 다섯 주제가 한 길 위에 겹쳐서 이어진다. 이 집은 그 가운데 백제부흥군길에 속한다. 패망한 왕조의 마지막 항전과 한 집안의 수백 년 거처와 오늘의 도보 여행자가 같은 흙을 밟으며 걷는 길은 늘 이렇게 여러 시간을 한 줄로 꿰어 놓는다.

마당을 나서며 다시 얼방문을 돌아본다. 가을에는 이 문 위로 비가 내렸고 여름에는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꽃비라는 이름은 비가 올 때보다 비가 멎은 마른 마당에서 더 선명해진다. 내리지 않는 것을 떠올릴 때 그것은 기억속에서 가장 또렷해지는 법이다. 비어 있는 마루와 손질된 잔디와 돌에 새겨진 글자들 사이를 걷다 보면 이 집이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어떤 정해진 교훈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지나간 자리를 지우지 않고 두는 일에 가깝다. 여름 홍성의 사운고택은 그 자리에 서서 다음 계절의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 오기전에 방문해보기에 좋은 곳이다.
* 취재일 : 2026년 6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