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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내용을 읽어드릴까요?

영화 허수아비가 촬영되었던 서천 판교의 촬영지 탐방

  • 위치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147-12
  • 등록일자
    2026.06.05(금) 12:03:39
  • 담당자
    지민이의 식객 (chdspeed@daum.net)
  • 자주 방문하는 여행지중에 서천군 판교면이라는 지역은 한때 우시장과 양조장으로 분주했고 그 한가운데 옛 판교역이 있었으며, 1936년에 세워진 정미소가 2006년까지 같은 자리에서 쌀을 도정하던 마을은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시대에 시간이 천천히 흐른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이번 방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 작은 마을이 동시에 세 권의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허수아비 촬영지와 근대역사공간탐방


    영화 「허수아비」의 촬영지로서의 판교. 또 한 권은 시의 책이다. 「판교의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시인 네 명의 전시. 마지막 한 권은 건축의 책이다. 1936년의 정미소, 옛 주조장, 사진관, 극장 같은 근대문화유산의 아카이브를 돌아보면 어떨까. 세 권이 서로 다른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골목 안에서 한꺼번에 펼쳐져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은 한 시간이면 다 돌아볼 만큼 작지만, 그 한 시간 안에 시대의 여러 색을 동시에 만나볼 수가 있다. 


    마을의 작은 사거리에 갈색 입간판 하나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허수아비 촬영지'. 그 옆으로 또 하나의 입간판이 보였고, 거기에는 두 인물이 책장 앞에 서 있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와, 가방을 멘 단발머리의 여학생이 눈에 뜨인다. 영화 「허수아비」는 강성문고와 장미사진관, 두 곳의 옛 가게를 주요 촬영지로 삼았다. 강성문고는 여전히 책방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면 흰 커튼과 스탠드,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이 보인다. '동네책방 책 읽기'라는 주황색 포스터가 유리에 붙어 있고, 그 옆에는 영화 「개훈할영」(2016)의 무료 상영을 알리는 포스터도 함께 붙어 있다.


    영화 허수아비 촬영지와 근대역사공간탐방


    영화의 한 장면이 촬영되었던 공간이 그대로 살아 있는 책방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세트가 아니라, 원래 있던 자리가 카메라 앞에 그대로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방은 영화를 본 사람에게는 영화 속 한 장면이고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저 오래된 마을의 한 책방이다. 


    길 건너편의 장미사진관도 마찬가지다. 푸른 양철지붕 아래, 낡은 나무 문이 그대로 달려 있는 옛 사진관. 안내판에는 '허수아비 촬영지 장미사진관'이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로 영화의 한 장면이 작게 인쇄되어 있다. 사진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시간을 멈춰 두는 일을 하는 자리인데, 그 사진관 자체가 한 시대의 사진처럼 그대로 멈춰 있다는 사실이 묘했다. 


    영화 허수아비 촬영지와 근대역사공간탐방


    장미사진관 안쪽에는 지금 또 다른 전시가 들어가 있다. 옛 마루와 흙벽 사이에 앤디 워홀풍의 포도와 인물 실크스크린 두 점이 걸려 있고, 낡은 의자 두 개가 그 앞에 놓여 있다. 오래된 사진관의 흙벽과 현대 팝아트의 노란색이 한 벽에서 만나는 풍경. 이 마을이 옛것을 옛것 그대로만 두지 않는다는 것을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 자리였다.


    영화 허수아비 촬영지와 근대역사공간탐방


    그 안에 지금「판교의 시인」이라는 전시가 들어가 있다. 강석화, 도복희, 이창우, 정완희. 네 명의 시인의 작품과 영상이 70년 된 정미소의 내부에 놓여 있다. 영상 제작은 NODE TREE가 맡았다.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작은 좌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나무 좌탁 위에 시집 몇 권이 쌓여 있고, 그 양쪽으로 흰 방석이 두 장 깔려 있다. 벽은 정미소의 옛 흙벽 그대로다. 갈라진 결, 누런 빛깔, 천장의 굵은 나무 보까지 그대로 살아 있다. 그 한가운데에 시집이 놓여 있다는 것. 이 배치가 한 줄의 시처럼 읽혔다.


    영화 허수아비 촬영지와 근대역사공간탐방


    다음 장소는 강성문고와 삼화정미소다. 영문 안내판에는 'Samhwa Rice Mill, founded in 1936, remained in operation until 2006'이라고 적혀 있다. 1936년에 세워져 70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쌀을 도정했고, 오 씨 성을 가진 삼 형제가 운영했기에 'The Oh's Millhouse'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원래 단층이었던 건물은 기계를 들이면서 위쪽으로 한 번 더 확장되었다. 안내판의 아이소메트릭 도면에서 1936년의 흰색 골조 위에 1965년 증축의 붉은 골조가 얹혀 있는 구조를 보면 이 건물 자체가 한 시대의 적층이라는 것이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옆 공간에는 검은 책상 위로 시인들의 책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전시 중인 시인의 책을 무료 배포합니다'라는 안내문이 작은 액자에 들어 있었다. 한 마을이 자기 자리에서 쓴 시를 그 마을의 가장 오래된 건물 안에서 무료로 나누어 준다는 것. 이런 일이 가능한 곳이 아직 한국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작게 마음에 닿았다. 


    영화 허수아비 촬영지와 근대역사공간탐방


    정미소의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옛 기계의 잔해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굵은 나무 기둥들, 갈색으로 바랜 도정 슈트, 도르래와 벨트, 천장을 가로지르는 굵은 들보들. 한때 쌀을 도정하던 기계 소리로 가득했을 그 자리가 지금은 시집과 함께 침묵하고 있다. 곡식을 깎아 내던 자리에서 한 시인이 자기 마음을 깎아 내며 쓴 시를 읽는다는 일. 이런 우연이 시처럼 잘 맞아떨어졌다.


    전시 제목은 「판교의 시인」이고, 시인 다섯 명의 또 다른 전시가 마을 곳곳에 함께 펼쳐져 있다. 「판교의 미술작가」라는 이름으로 이남수, 조혜림, 최명규, 한화정, 현영섭의 작품이 마을의 다른 자리에 걸려 있는 것이다. 한 마을이 시와 미술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영화 허수아비 촬영지와 근대역사공간탐방


    마을 한쪽에는 '현암마을 아카이브 (The heritage of Hyunam Village)'라는 푸른 포스터가 흙벽에 단정하게 붙어 있다. 판교의 본래 행정동 이름은 현암리이고, 이 일대가 곧 현암마을이다. 이 아카이브에는 일곱 채의 건물이 등록문화재로 묶여 있다. 동일정미소, 동일주조장, 장미사진관, 오 방앗간, 중대본부, 일광상회, 그리고 판교극장. 한 마을이 한 시대의 산업과 생활을 어떻게 떠받쳤는지가 일곱 채의 건물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영화 허수아비 촬영지와 근대역사공간탐방


    판교에서는 정미소가 두 곳, 주조장 한 곳, 사진관 한 곳, 방앗간 한 곳, 그리고 극장 한 채. 이 구성이 1930~60년대 한국의 중소 읍면이 어떤 모양으로 살아 움직였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쌀을 도정하고 술을 빚고 사람을 사진으로 남기고 같은 사람들이 모여 영화를 보았다. 한 마을의 모든 일상이 도보로 5분 안에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정미소는 대규모 공장으로 통합되었고 양조장은 대기업의 캔맥주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사진관은 스마트폰에 흡수되었고 극장은 멀티플렉스로 옮겨 갔다. 한 마을 안에서 자족적으로 돌아가던 그 구조가 이제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현암마을 아카이브는 단순한 건축물의 보존이 아니라 한 시대의 생활양식 전체의 보존이다.


    영화 허수아비 촬영지와 근대역사공간탐방


    판교 마을의 골목은 넓지는 않지만 좁은 길 양쪽으로 낮은 단층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길 한가운데로 전봇대와 전선이 어지럽게 가로지른다. 노란빛의 벽돌집, 푸른 양철지붕, 붉은 양철지붕, 흰 회벽. 색의 농담이 한 화면 안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이 골목을 천천히 걷다 보면 영화 「허수아비」의 안내판이 한 번 나타나고, 「판교의 시인」의 푸른 포스터가 또 한 번 나타나며, 1936년 정미소의 검은 안내판이 또 한 번 나타난다. 골목이 한 권의 책처럼 페이지를 넘기듯 풍경을 바꾼다. 그러는 동안 같은 마을의 다른 시간이 한 사람의 산책 안에 차곡차곡 쌓인다.


    영화 허수아비 촬영지와 근대역사공간탐방


    판교의 가장 큰 매력은 이 마을이 자기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다른 도시처럼 옛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올린 것도 아니고 박물관처럼 옛 건물을 유리 안에 가둔 것도 아니다. 1936년의 정미소 안에서 2026년의 시 전시를 열고 옛 사진관 안에 현대 팝아트를 걸어 두고, 동네책방 한 채를 그대로 두면서 그 안에서 영화를 찍게 한다. 옛것을 그 자리에 두되 그 자리에 새로운 일을 들이는 방식이다. 이것이 판교가 자기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제 판교로 문학여행과 영화감성을 만나보기에 좋은 때다. 



     * 취재일 : 2026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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