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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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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 좋은 날, 판교에서 — 옛 극장의 빈 객석이 들려주는 이야기

  • 위치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145-2
  • 등록일자
    2026.06.03(수) 13:44:00
  • 담당자
    지민이의 식객 (chdspeed@daum.net)
  • 영화란 것이 어떤 감성을 줄까. 지금은 유튜브나 OTT로 너무나 편하게 셀 수 없는 콘텐츠를 접할 수가 있지만 과거에는 그 의미가 달랐다. 사실 필자는 그 시대를 살았지만 적극적으로 문화를 경험했던 세대는 아니다. 그렇지만 마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듯한 이야기를 지금도 쓰고 있다. 이번 방문해 본 판교라는 이름과 영화관이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어울리는 조합이었을까.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한때 우시장과 양조장으로 분주했던 마을이 시간의 흐름을 머금은 채 그대로 남아 있는 자리다.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은 그 시간의 결을 살려 둔 곳이고 그 한가운데에 옛 영화관이 한 채 서 있다.


    충남 서천 가볼 만한 곳,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옛 영화관


    문 안쪽으로 한 걸음 들어서면, 좁은 복도 양쪽으로 영화 포스터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다. 검은 액자에 담긴 색 바랜 포스터들 누군가의 청춘이 잠시 머물렀던 자리들이 그렇게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영화관 앞에 다다랐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이 머무는 곳은 외벽이다. 흰 타일이 격자무늬로 정연하게 붙어 있고, 그 위에는 색이 바랜 옛 영화 포스터들이 줄지어 붙어 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군복 차림의 흑백 사진, 빛바랜 글자들. 보지 않아도 보아온 듯한, 어디선가 한 번쯤 본 듯한 얼굴들이 거기에 그대로 있다. 


    충남 서천 가볼 만한 곳,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옛 영화관


    그 사이 한가운데에는 보랏빛 현수막이 단정하게 걸려 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판교에서. 이장호 영화감독 시네마 아카이브 특별전.' 매주 토·일 오후 두 시와 네 시에 무료 상영이 있고 6월 27일 토요일 오후에는 감독과의 대화도 마련되어 있다는 안내가 함께 보인다. 옆 벽의 작은 매표소 자리에는 상영 시간표 한 장이 단정하게 붙어 있다. 매표소의 작은 창이 비어 있지만 그 시간표 한 장이 이곳이 여전히 '극장'임을 조용히 일러준다.


    충남 서천 가볼 만한 곳,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옛 영화관


    안쪽으로 들어가면 복도 한쪽에는 '이장호의 외인구단' 포스터가 걸려 있다. 1986년 작. "지독한 남자들의 눈물겨운 사랑승부!"라는 큼지막한 문구 위로 안성기, 이보희, 최재성, 맹상훈의 얼굴이 겹쳐 있다. 한국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그 시절 모든 청춘에게 'LOVE POWER'라는 단어를 가르쳤다. 지금 보면 촌스럽다 싶은 카피 한 줄은 그때 우리에게는 가장 진지한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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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더 안쪽에는 또 한 장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무릎과 무릎사이'. 1984년 작, 이장호 감독의 자전적 여성영화. "TOUCH!!"라는 영문 카피 아래 "향기가 나요. 당신의 영토, 나의 육감의 영역! 나는 당신을 침범할 수 있어요!"라는 문장이 단정하게 적혀 있다. 80년대 한국 영화가 사회와 감각의 경계를 어떻게 흔들었는지, 한 장의 종이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전시장 본관으로 들어서면 천장이 한 번 트여서 시원스럽다. 옛 영화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간 머리 위로는 검은 트러스와 조명 음향 장비가 빼곡히 매달려 있고 그 아래 흰 벽 위로 영상 한 편이 천천히 흐른다. 흰 셔츠를 입은 한 남자의 옆모습. 누군가 무언가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그 한 컷이, 정지된 시간 위에서 천천히 움직인다.


    충남 서천 가볼 만한 곳,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옛 영화관


    바닥에는 둥근 흰 좌대 위로 옛 35mm 필름 캔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누런 황동색 통 위에 푸른 라벨이 붙어 있는 모양으로 영화가 '필름'이라는 물성을 가지고 있던 시절의 기억이 그대로 거기에 있다. 한 편의 영화에는 보통 여섯에서 여덟 개의 캔이 필요했다. 그 캔들을 모터 위에 걸어 영사기가 돌아가던 소리, 영사기실에서 흘러나오던 미열의 냄새는 이제 거의 사라진 감각이다.


    충남 서천 가볼 만한 곳,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옛 영화관


    전시의 한쪽 벽면에는 이장호 감독의 대표작 다섯 편이 한 줄로 걸려 있다. '별들의 고향'(1974), '너 또한 별이 되어'(1975),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1981), '바보선언'(1983).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사회가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폭력적으로 변하던 시기의 풍경이 다섯 장의 포스터에 응축되어 있다.


    그 시절의 영화는 지금의 영화와 같은 단어로 부를 수 있을까. '별들의 고향'의 경아는 한 시대를 살아낸 모든 여성의 슬픔을 한 몸에 짊어졌고 '바람 불어 좋은 날'의 덕배는 시골에서 올라온 청년이 도시에서 마주한 첫 환멸을 대신 겪었다. '바보선언'의 동철과 혜영은 군부 정권의 검열 한가운데에서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 영화들이 개봉되던 극장은 단순한 오락 장소가 아니었다. 한 시대가 스스로를 들여다보던,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춰보던 거울이었다. 


    충남 서천 가볼 만한 곳,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옛 영화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천장의 굵은 나무 보가 그대로 드러난 공간. 흰 벽을 따라 작은 모니터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고, 각 화면에는 이장호 감독의 영화 한 장면씩이 끊임없이 상영되고 있다.


    붉은 모자를 쓴 노감독의 얼굴이 한 화면 가득 비친다. 여든을 넘긴 이장호 감독이 자신의 오십 년 영화 인생을 천천히 풀어놓고 있다. 옆 화면에는 푸른 배경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작게 떠 있다. 화면과 화면 사이의 정적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건넨다.


    충남 서천 가볼 만한 곳,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옛 영화관


    캠핑 의자 몇 개가 듬성듬성 놓여 있을 뿐 빈 공간이 대부분이다. 관람객이 의자에 앉아 한 장면씩 천천히 보아도 좋고 그저 천천히 걸어 다니며 한 화면씩 스쳐 지나도 좋다. 그 자유로움이 이 공간의 미덕이다. 한때 한 줄로 늘어선 좌석 위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흩어진 화면을 각자의 동선으로 살펴본다. 영화를 보는 방식이 바뀐 만큼, 영화를 기억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전시장을 빠져나와 다시 영화관 밖으로 나와 본다. 양옆으로 낮은 단층 건물들이 줄지어 선 좁은 길과 푸른 양철 지붕과 흰 회벽등 시간이 겹쳐 흐르는 풍경이다. 1930년대에 지어진 건물과 1990년대에 설치된 안테나가 한 화면 안에 공존하는 자리. 판교는 그렇게 여러 시대를 동시에 살아내고 있다.


    충남 서천 가볼 만한 곳,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옛 영화관


    영화는 한때 한 시대의 공기였다. 사람들은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섰고 어두운 객석에 앉아 두 시간 동안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빛을 마주하는 그 행위가 한 사회를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었다. 지금 영화는 손바닥 위의 작은 화면에서, 침대 위의 헤드폰을 통해, 각자의 속도로 소비된다. 더 자유로워졌지만 그 자유 안에서 함께 무언가를 보았다는 감각은 점점 옅어져 간다.


    충남 서천 가볼 만한 곳,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옛 영화관


    판교영화관은 그 옅어진 감각을 잠시 되살리는 자리다. 무료 상영의 객석에 앉아 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한 편의 영화가 끝나고 불이 들어왔을 때 옆자리 낯선 사람과 잠시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이야말로 극장이라는 공간이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건네주는 선물이 아니었을까. 바람 불어 좋은 날 판교에서. 이 한 문장 안에는 1980년의 추억 그리고 2026년에는 오래된 영화가 함께 머물러 있다.


     * 취재일 : 2026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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