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의 여왕 5월, 초록이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초순입니다. 찌뿌둥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창문을 반쯤 내린 채 칠갑산 자락으로 차를 몰아봅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상쾌한 봄바람이 차 안으로 훅 밀려들어 오네요. 지금 콧노래를 부르며 달리는 이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50선’에 이름 올린 칠갑산 숲길입니다. 머리 위로는 갓 피어난 연둣빛 잎사귀들이 거대한 터널을 이루고,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봄 햇살이 환영 인사처럼 쏟아집니다. 싱그러운 흙내음을 마시며 드라이브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여정의 목적지인 청양 장곡사 초입에 다다릅니다. 봄날의 몽글몽글한 설렘을 안고,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로 함께 걸어 들어가 보실까요?

1. 천년의 숲길을 지나 일주문을 품다
장곡사 입구에 들어서자 거대한 일주문이 우뚝 서서 시선을 압도합니다. 속세의 묵은 번뇌를 씻고 부처님의 진리 세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이지요. 산속에 홀로 선 웅장한 자태를 마주하니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일주문을 지나 오르막을 타다 보면 아래쪽에 마련된 주차장이 나타납니다. 차를 세워두고 산사로 향합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 고요한 사찰이 품은 깊은 역사가 궁금해집니다.

장곡사는 신라 문성왕 12년인 850년에 보조선사 체징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년 고찰입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전란과 풍파를 겪으면서도 칠갑산 품 안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죠. 특히 장곡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 유일하게 대웅전이 상, 하 두 개로 나뉘어 있는 곳입니다. 건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신비로운 공간이랍니다.

2. 운학루 너머, 오색 연등과 하대웅전의 신비
피톤치드 가득한 산길을 걷다 보니, '운학루'라는 현판이 걸린 운치 있는 2층 누각이 여행자를 반깁니다.


운학루 아래를 통과해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니, 드디어 하단 마당인 하대웅전 앞마당이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운학루는 구름과 학이 노니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경내로 진입하는 출입문 역할과 함께 신선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저도 모르게 얕은 탄성을 뱉고 말았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둔 5월 초, 사찰 마당은 형형색색의 화려한 연등으로 덮여 있습니다. 파란 하늘을 캔버스 삼아 붉고 푸른 연등들이 봄바람에 살랑이며 황홀한 물결을 만듭니다.

운학루 옆에는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는 범종루가 자리해 산사의 깊은 분위기를 더해줍니다.


이 마당에 자리한 건물이 바로 하대웅전입니다. 보물 제181호로 지정된 하대웅전은 조선 중기의 단아한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목조 건물입니다. 빛바랜 단청의 색감에서 억지로 꾸미지 않은 기품이 느껴지며, 아담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묵직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3. 돌계단 위에서 마주한 천년의 미소, 상대웅전
하대웅전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장곡사의 또 다른 중심인 상대웅전으로 오르는 투박한 돌계단이 나타납니다. 돌계단을 밟고 오르는 길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구도자의 길처럼 기분 좋은 떨림을 줍니다. 마침내 한 단 높은 곳에 자리한 상대웅전에 도착했습니다.

이곳 앞마당 역시 화려한 연등이 하늘을 빈틈없이 덮어 장관을 연출합니다. 마당 안쪽의 보물 제162호 상대웅전은 온화한 자태를 드러냅니다.

하대웅전보다 앞선 고려 시대와 조선 초기의 건축 양식을 간직해 건축사적 의미가 남다릅니다. 내부에 발을 들이면 바닥이 나무 마루가 아니라 흙을 구워 만든 무늬 있는 전돌로 깔려 있는데, 이는 희귀한 장곡사만의 매력 포인트입니다.

이곳에는 사찰 최고의 보물, 제174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및 석조대좌가 모셔져 있습니다. 차가운 철로 주조되었음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온화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친 마음이 단번에 어루만져집니다.

참배를 마치고 마당 끝자락에 서서 아래를 굽어봅니다. 하단 전각들의 고풍스러운 지붕, 오색 연등, 칠갑산의 푸른 능선이 완벽한 진경산수화를 완성합니다.

4. 칠갑산 자락에서 굽어보는 장곡사, 부서진 석탑
상대웅전의 감동을 뒤로하고, 사찰의 가장 높은 곳에 고즈넉이 자리한 삼성각을 향해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오릅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삼성각에 도착해 장곡사 경내 전체를 넓은 시야로 조망해 봅니다.

지형의 높낮이에 순응하며 지어진 두 대웅전의 독특한 배치, 산과 숲과 건물이 혼연일체를 이룬 모습이 경이롭습니다. 처마 끝 풍경 소리와 산새들의 지저귐만이 고요한 공간을 채우고, 일상의 번뇌는 산바람에 깨끗이 씻겨 날아갑니다.

한참을 머물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내려오는 길, 산책로 중간쯤에서 쓸쓸히 서 있는 부서진 석탑 하나를 우연히 마주했습니다. 오랜 세월의 풍파에 깨어져 나갔지만, 흠집투성이의 모습 자체가 천년의 시간을 증명하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세월의 무상함 속에서도 변치 않는 진리가 있다고 이야기하듯, 부서진 석탑은 내려가는 제 뒷모습을 향해 무언의 묵직한 가르침을 건네는 듯했습니다.

자연이 내어주는 맑은 기운과 함께했던 청양 장곡사 기행, 어떠셨나요? 아름다운 길을 달리는 상쾌한 드라이브부터, 두 대웅전이 품은 천년 건축의 신비, 화려한 연등 물결의 장관, 부서진 석탑이 들려주는 묵직한 이야기까지 눈부신 봄날의 여정이었습니다. 연둣빛 싱그러움이 절정에 달한 5월, 천년 역사의 숨결과 칠갑산 자연의 위로가 공존하는 청양 장곡사를 추천합니다.
청양 장곡사
○ 장소 :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길 241
○ 전화 : 041-942-6769
○ 관람료 : 무료
○ 주차비 : 무료
* 취재(방문)일 : 2026년 5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