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의 말에 담긴 삶과 정신
서두르지 않고 배려하는 마음
올해는 한글날을 제정하여 기념한지 1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1926년 조선어연구회가 음력 9월 29일,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가갸날’을 선포한 것이 한글날의 시작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우리말과 글을 끝까지 지켜낸 선각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세계가 인정하는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을 일상에서 온전히 누리며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벅찬 시간 너머 우리가 조금씩 잊어버리고 있는 소중한 자산, 바로 ‘사투리’의 소멸이라는 안타까운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말을 정말 잘 지키고 있는가?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에는 ‘충남 우리말 가꿈이’라는 이름의 동아리가 있다. 우리말의 소중함을 알고 그 말을 보존하고 가꾸기 위한 활동을 함께 하는 학생들의 모임이다. 지난주에는 ‘가꿈이’ 학생들이 지역의 어르신들을 직접 찾아뵙고 어르신들의 말씀 속에서 다듬어야 할 우리말이 무엇인지 살피며 충남 사투리를 찾는 일을 하였다. 학생들이 경로당 문을 두드리고 어르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잊혀가는 우리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그 활동 결과를 들으며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르신들의 말씀에서 어휘는 이미 많이 사라졌고, 충남 사투리의 흔적은 주로 어미에만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언어의 변화는 삶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어휘가 먼저 소멸하고 문법 요소는 나중까지 남는 경향이 있다. 학생들이 조사 보고서에 ‘어휘는 많이 사라지고 어미만 남아 있다’고 기록한 것은, 대상을 가리키는 어휘에 깃들었던 구체적인 삶의 장면들이 이전의 시대와는 점점 달라지고 있는 것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결 어미는 아직까지 충남 사투리의 모습을 담고 있어 그 말을 사용하는 충남 사람의 정신적 결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어르신들의 말씀에서 특별히 인상 깊었던 표현은 ‘가생이’와 ‘~겨, ~디야’로 끝나는 말씀이었다. ‘가생이’는 '가장자리'를 뜻하는 사투리이다. “가생이에 좀 남겨둬라”는 말 한마디에는 넉넉하게 나누려는 충남 사람의 마음씨가 담겨 있다. 표준어 '가장자리'로는 전해지지 않는 그 온기가 ‘가생이’라는 말 속에 살아있다. 그리고 ‘~겨’와 ‘~디야’ 같은 종결 어미도 마찬가지이다. “그게 그런겨”, “누가 거기 있었디야?”처럼 쓰이는 이 말들은 어떤 사실을 먼저 단언하지 않고, 상대방을 다그치지도 않으며, 대답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태도이다. 이 어미들은 충남 사람들의 정신, 곧 서두르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며 관계를 맺어온 삶의 방식 그 자체이다.
말은 삶을 담는 그릇이다. 어떤 공동체가 수백 년에 걸쳐 쌓아온 경험과 지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시선은 그 공동체의 말 속에 녹아든다. 조금은 느린 것 같고 조금은 두루뭉술하게 느껴지는 충남 사투리는 단순히 발음의 특성이 아니라, 이 지역에 살아온 사람들의 세계관이 언어에 새겨진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이 사라지면 그 정신도 함께 사라진다. 우리가 사투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투리는 한 지역에서 수백 년간 살아온 사람들의 정신과 삶이 응축된 언어 자산이다. 표준어가 모두를 위한 공통의 언어라면, 사투리는 각 지역 공동체의 고유한 정체성이다. 둘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관계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한글로 표기할 수 있는 수많은 말들, 특히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사라지고 있는 지역의 말들을 붙잡는 일이다. 말이 사라지면 그 말에 담긴 삶도, 그 말을 빚어온 정신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충남의 말을 지키는 일은 충남의 삶과 정신을 지키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