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펼쳐진 여섯 개의 면천
청년 예술가들의 시선으로 다시 만난 면천읍성 ‘예술가들의 집단지성’
지난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당진시 면천읍성 일원에서 ‘2026 면천읍성 달빛야행’이 열렸습니다. 해가 지고 성곽과 골목에 불빛이 하나둘 켜지자, 낮과는 전혀 다른 면천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오래된 성곽을 따라 걷는 사람들, 공연을 기다리는 가족, 골목 곳곳의 체험과 전시를 살펴보는 방문객이 어우러지며 면천읍성의 여름밤이 풍성하게 채워졌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올해 면천읍성 달빛야행에서는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도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청년 예술가들이 참여한 레지던시 연계 전시 ‘예술가들의 집단지성’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공모를 통해 선정된 청년 예술가들이 참여했습니다. 선정된 작가와 팀은 김시은, 남소연, 이윤영, 정수빈, 정은주, 초승달토끼로 모두 여섯 작가(팀)입니다. 설치미술과 회화, 섬유, 애니메이션, 미디어아트, 아카이빙, 연극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청년 예술가들이 면천읍성과 성안마을을 각자의 방식으로 관찰하고 해석했습니다.
필자 역시 정수빈 작가로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평소 면천에서 지역을 관찰하고 기록해 왔지만, 작가들과 함께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면천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성돌을 살펴봐도 작가마다 눈에 담는 장면과 질문이 다르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작품보다 먼저 시작된 ‘관찰의 시간’
이번 전시는 달빛야행 행사에 맞춰 완성된 작품만 보여주는 일회성 전시가 아니었습니다. 참여 작가들은 전시에 앞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면천에 머물며 지역의 역사와 공간을 살펴봤습니다.
면천읍성의 성곽과 객사, 조종관 같은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생활하는 골목과 오래된 건물, 옛 학교와 우체국의 흔적,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돌, 마을에 남아 있는 기억까지 작품의 소재가 됐습니다.
면천읍성을 충분히 걷고 관찰하며 “이 장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오래된 문화유산을 오늘의 삶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작가들은 현장에서 발견한 장면을 사진과 글, 드로잉으로 기록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작품의 방향을 구체화했습니다.
프로젝트 이름인 ‘예술가들의 집단지성’도 이러한 과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의 주제를 여섯 작가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경험과 감각을 보태 면천읍성을 더욱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성돌에 남은 흔적을 살펴봤고, 누군가는 흩어진 각자성돌을 따라갔습니다. 면천읍성을 지키는 상상 속 동물을 떠올린 작가도 있었고, 골목에서 수집한 색으로 팔레트를 만든 작가도 있었습니다. 면천에 머물며 마음에 남은 문장을 기록하거나, 오래된 우체국 자리에서 발견한 편지 한 통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팀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장소에서 출발한 여섯 개의 시선은 설치와 회화, 지도, 영상, 색채 아카이빙, 관객 참여, 낭독극이라는 서로 다른 형태로 펼쳐졌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복원 과정에서 사라지는 흔적을 바라보다
김시온 작가는 인프라와 유통 시스템을 주제로 작업하는 설치미술가입니다.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공공성을 인정받지 못해 쉽게 잊히거나 사라지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이번 작업에서는 면천읍성 복원사업을 둘러싼 ‘유지와 복원’의 의미에 주목했습니다. 문화유산을 복원할 때는 과거의 모습을 되찾는 일이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과거의 어느 한 시점으로 모습을 되돌리는 과정에서, 그 이후 성돌에 쌓인 생활의 흔적과 현재의 시간이 지워질 수도 있습니다.
김시온 작가는 현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돌을 스캐닝하고 이를 작품으로 제작했습니다. 성돌을 읍성을 이루는 건축 재료로만 바라보지 않고, 오랜 시간 여러 사람과 환경을 거치며 변화해 온 하나의 기록물로 바라본 것입니다.
작품은 문화유산을 복원한다는 것이 단순히 옛 모습을 되찾는 일인지, 아니면 그 위에 쌓인 여러 시대의 흔적까지 함께 기억하는 일인지 질문하게 했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사라진 각자성돌을 따라 만든 새로운 지도
남소연 작가는 회화와 영상, 인터랙티브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기술과 감정, 공간과 소통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지역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설명하기보다 관람객이 직접 발견하고 참여할 수 있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남소연 작가는 면천읍성의 각자성돌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각자성돌은 글자나 기호가 새겨진 돌로, 읍성을 쌓는 과정과 관련된 정보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며 일부 성돌은 본래 자리에서 사라지거나 성안마을 곳곳에서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됐던 성돌이 주민들의 생활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얻는 과정에 주목했습니다. 사라지거나 흩어진 각자성돌의 흔적을 추적하고, 돌이 놓인 공간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아카이빙했습니다.
수집한 기록은 하나의 지도로 다시 구성됐습니다. 지도에는 돌의 위치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쌓인 시간과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겼습니다. 작품을 통해 관람객은 성돌을 과거의 유물이 아닌, 지금도 마을 안에서 관계를 만들어 가는 존재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상상 속 사신수가 지키는 면천읍성
이윤영 작가는 사람과 동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감동과 재미를 전하는 작품을 선보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면천읍성을 소재로 한 섬유 작품을 통해 역사와 상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습니다.
‘백호, 청룡, 주작, 현무-사신수’는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사신수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백호와 청룡, 주작과 현무가 가진 상징과 이미지를 작가만의 회화적 방식으로 풀어냈습니다.
오랜 시간 면천읍성을 지켜온 존재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어린이 관람객에게는 친근하고 흥미로운 상상의 동물로 다가가고, 어른들에게는 면천읍성의 시간과 수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또 다른 작품 ‘조선시대로의 회귀’에서는 조선시대 면천읍성을 오갔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당시에도 사람들은 성문을 오가고,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 골목에서 이웃을 만나며 일상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기록 속 인물을 멀리 있는 역사로 바라보지 않고, 지금의 우리처럼 이곳을 살아간 사람으로 그려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골목에서 수집한 색으로 만든 ‘면천 팔레트’
필자인 정수빈 작가는 면천에서 지역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청년 크리에이터입니다. 장소에 남아 있는 색과 사람들의 기억,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을 수집해 시각적인 기록으로 표현했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면천 팔레트: 보이는 색, 보이지 않는 색’은 익숙한 면천을 ‘색’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본 색채 아카이빙 작업입니다.
면천읍성을 하나의 고정된 풍경으로 바라보지 않고, 남아 있는 흔적과 바뀐 쓰임, 사람의 생명과 현재의 주거 풍경에서 색을 수집했습니다.
과거 면천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서 발견한 계단 벽화의 흔적은 ‘기억의 색’이 됐습니다. 주민들이 낡은 장화와 주전자, 냄비에 식물을 심어 놓은 모습에서는 ‘생활의 색’을 발견했습니다. 희어진 어르신의 머리카락과 이제 막 삶을 시작한 어린아이의 머리와 손에서는 서로 다른 세대가 이어지는 ‘생명의 색’을 떠올렸습니다.
읍성 정비 과정에서 땅속에 묻혀 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돌은 ‘발견의 색’으로 기록했습니다. 골목의 은은한 가로등과 주민들의 집, 저녁 하늘이 겹쳐진 풍경에서는 역사유산과 생활 공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골목의 색’을 수집했습니다.
각 장면에서 추출한 세 가지 색을 다시 섞어 하나의 색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색은 실제 풍경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현재의 면천읍성을 이루는 여러 장면을 바라본 작가의 해석입니다.
관람객이 함께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참여 공간도 마련했습니다. “당신에게 면천은 어떤 색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각자가 떠올린 면천의 색과 이야기를 남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면천은 오래된 성곽의 회색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해 질 무렵 골목을 밝히는 노란빛이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달빛야행을 찾은 관람객에게는 이날의 즐거운 기억을 담은 색이 되기도 했습니다. 작가가 먼저 수집한 면천의 팔레트에 관람객의 기억과 감정이 더해지며 작품의 범위도 넓어졌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면천에 머물며 발견한 문장들
정은주 작가는 애니메이션과 미디어 분야에서 활동하며 ‘한 번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비롯한 다양한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머문 자리에 남은 문장들’을 선보였습니다. 면천읍성을 걷고, 보고, 조사하는 동안 작가의 마음에 남은 장면과 문장을 기록한 작업입니다.
빠르게 지나가면 놓치기 쉬운 풍경도 한곳에 머물러 바라보면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낡은 벽의 선과 성돌의 모양, 골목에서 만난 사물과 사람의 말이 작가의 시선을 거쳐 드로잉과 문장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정은주 작가는 일상의 경험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고, 그 선이 다시 작품이 되는 과정을 보여줬습니다. 완성된 문화유산의 모습보다 면천에 머무는 동안 생긴 감정과 생각의 변화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레지던시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이름 없는 편지를 따라 면천 골목을 걷다
변현승, 김선영으로 구성된 2인 창작팀 초승달토끼는 낭독극 ‘면천읍성에서 편지 주인을 찾습니다’를 선보였습니다.
김선영 연출가와 초승달 극작가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면천읍성과 성안마을을 직접 조사했습니다. 극은 오랫동안 팔리지 않던 고향집이 팔린 후, 5년 만에 면천읍성을 찾아온 주인공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주인공은 옛 우체국 자리에 들어선 현재의 미술관에서 이름 없는 편지 한 통을 발견합니다. 편지의 수신인을 찾기 위해 자전거포였던 책방, 우체국이었던 미술관과 카페, 대폿집이었던 상회, 삼대째 이어온 국숫집 등 마을의 다섯 공간을 지나게 됩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편지의 주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각 공간이 품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펼쳐졌습니다. 지금은 책방이나 카페, 상회가 된 공간들이 과거에는 어떤 장소였는지 알게 되면서 관람객은 면천의 골목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 면천의 공간과 주민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습니다. 면천읍성 조종관에서 진행된 낭독극은 무대 위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연을 본 관람객이 다시 성안마을을 걸으며 작품 속 공간을 찾아보게 만들었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전시장을 넘어 면천 전체로 이어진 작품
‘예술가들의 집단지성’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작품의 형식이 모두 달랐다는 것입니다. 성돌을 스캐닝한 설치 작품과 흩어진 각자성돌을 추적한 지도, 상상력을 더한 섬유 회화, 지역의 색을 수집한 아카이빙, 면천에 머물며 기록한 문장과 드로잉, 실제 마을의 공간을 이야기로 연결한 낭독극이 함께 펼쳐졌습니다.
관람객이 작품을 만나는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작품 앞에 서서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도를 따라 성돌의 흔적을 찾아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면천의 색을 남기고, 공연 속 주인공과 함께 편지의 수신인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장은 하나의 공간이었지만 작품은 면천읍성과 조종관, 골목과 오래된 건물, 주민들의 기억으로 이어졌습니다. 문화유산을 과거의 모습으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연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익숙한 지역도 새로운 시선을 만나면 달라집니다
작가로 직접 참여하며 느낀 것은 지역을 오래 알고 있다는 사실과 지역을 자세히 바라본다는 것은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매일 지나던 골목도 다른 작가의 질문을 통해 바라보니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보였습니다.
면천읍성은 오랜 역사를 품은 문화유산이지만, 동시에 주민들이 살아가는 생활 공간입니다. 복원된 성곽과 오래된 골목, 새롭게 문을 연 공간과 사라진 장소의 기억이 함께 존재합니다. 이번 전시는 그 경계에 서서 면천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했습니다.
여섯 작가(팀)가 발견한 면천은 모두 달랐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시선이 한자리에 모이자 면천읍성은 더욱 입체적인 장소가 됐습니다. 하나의 정답으로 지역을 설명하기보다 여러 사람의 시선을 통해 지역의 모습을 넓혀갔다는 점에서 ‘집단지성’이라는 이름이 더욱 잘 어울렸습니다.
달빛야행과 함께한 전시는 끝났지만, 작가들이 면천에서 발견한 질문과 이야기는 작품 안에 남았습니다. 전시에 참여한 청년 예술가들이 면천에서 무엇을 보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했는지 들려주는 인터뷰 영상도 추후 공개될 예정입니다.
완성된 작품만으로는 모두 전하기 어려웠던 레지던시 과정과 작가들의 고민, 서로 다른 작업 방식까지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고 하니 기대해도 좋겠습니다.
이번 ‘예술가들의 집단지성’을 계기로 면천읍성이 과거를 보존하는 문화유산을 넘어, 청년 예술가들이 지역을 관찰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창작의 무대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익숙한 지역도 누군가의 새로운 시선을 만나면 다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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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 면천읍성아트레지던시
[면천읍성 아트레지던시 | 예술가들의 집단지성]
○ 주소 : 충남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일대
○ 주차 : 무료
* 취재(방문)일 : 2026.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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