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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내용을 읽어드릴까요?

여름비가 남기고 간 초록빛 위로, 아산 공세리성당의 여름을 걷다

  • 위치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194-1
  • 등록일자
    2026.07.27(월) 03:25:27
  • 담당자
    호우 (foxbo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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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새 세상을 집어삼킬 듯 한바탕 요란한 장맛비가 쏟아졌습니다. 축축해진 공기를 가르고 충남 아산으로 향했습니다. 목적지는 언제 가도 마음의 닻을 내리게 하는 곳, '공세리성당'입니다. 가는 동안에도 하늘은 심술을 부리듯 비를 쏟아냈다 멈추기를 수차례 반복하더군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공세리성당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멈추고 구름 사이로 옅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땅이 머금은 짙은 흙내음이 코끝을 맴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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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를 세우고 성당 초입에 들어서니, 물기를 잔뜩 머금어 채도가 훌쩍 높아진 초록의 녹음이 짙게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철쭉이 융단처럼 깔렸던 봄, 붉고 노란 단풍이 그림 같았던 가을,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환상적인 불빛으로 가득했던 겨울의 공세리는 또렷이 기억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짙푸른 여름의 공세리는 처음인 듯합니다. 여름 한가운데서 마주한 이곳은 다른 계절과는 또 다른, 날것 그대로의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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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을 오르며 마주한 위로와 경이로움


    천천히 여유를 두고 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이어갑니다. 가장 먼저 정면에서 따뜻한 미소로 방문객을 맞이하는 '성가정상'에 가벼운 목례를 건네고, 완만한 언덕길을 사부작사부작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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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근처에 다다르니 단아한 자태의 성마리아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세상을 향해 기도하는 성마리아상의 모습에, 들떠있던 마음이 일순간 차분해지며 절로 경건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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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성마리아상 앞에는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수호신 같은 수령 350년의 느티나무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습니다. 높이만 20m가 넘는 이 웅장한 거목은 그저 크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가파른 언덕 경사면의 흙을 꽉 움켜쥐고 지탱해 온 탓에, 굵고 단단한 뿌리들이 지표면 위로 툭툭 불거져 나와 있습니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용의 비늘이나 거대한 짐승의 펄떡이는 힘줄처럼 요동치는 형상입니다. 그 기괴하면서도 신비로운 뿌리 사이사이에 자라난 초록빛 이끼 위로 투명한 빗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으니, 350년이라는 세월이 만들어낸 고혹적인 질감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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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주변으로는 여름을 알리는 보랏빛 맥문동 꽃들이 군락을 이루며 활짝 피어나, 초록의 도화지 위에 신비로운 색감을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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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벽돌이 들려주는 100년의 서사, 공세리성당


    느티나무의 경이로움을 뒤로하고 드디어 언덕 정상, 공세리성당 본당과 마주합니다.


    공세리성당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1890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본당으로, 지금의 매혹적인 붉은 벽돌 건물은 1922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초기 고딕 양식을 띠고 있는 이 건축물은 뾰족한 종탑과 붉은 벽돌, 그리고 이를 감싸 안은 주변의 거목들이 어우러져 사계절 내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을 자아냅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고지전>, 드라마 <아이리스> 등 수많은 작품의 촬영지로 사랑받은 이유도 바로 이 시대를 초월한 고풍스러운 아름다움 때문일 것입니다. 비에 젖어 평소보다 한층 더 붉은빛을 띠는 벽돌 외관은 여름날의 짙은 녹음과 완벽한 대비를 이루며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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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과 여름꽃들의 합창


    본당을 눈에 담은 뒤, 성당 주변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십자가의 길'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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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진 채 골고다 언덕을 올라 돌아가시고 묻히시기까지의 14가지 사건을 조각으로 표현해 둔 기도 산책로입니다. 공세리의 십자가의 길은 울창한 나무들이 천연 그늘을 만들어주는 아늑하고 고요한 숲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비 온 뒤라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이 정적을 깰 뿐,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정화되는 듯한 깊은 평온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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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길을 한 바퀴 돌아 앞서 올라올 때 마주했던 성가정상 앞으로 다시 내려왔습니다. 그곳엔 주황빛 원추리꽃이 여름 햇살을 기다리며 수줍게 피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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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길을 돌려 순교자 묘지 쪽으로 향하니, 여름꽃의 대명사인 탐스러운 수국과 쉽게 보기 힘든 눈처럼 하얀 흰 배롱나무꽃이 만개해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하듯 고결하게 피어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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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옆면에 조용히 서 있는 성모상 곁에서 바라본 성당의 측면은, 정면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입체적이고 우아한 선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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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눈으로만 담아낸 성당 내부와 뜻밖의 인연


    조심스레 본당 문을 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내부는 '촬영 금지' 구역입니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오롯이 두 눈과 마음에 이 공간을 담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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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내부는 화려함보다는 묵직한 경건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닿아 반질반질해진 나무 바닥, 기둥 사이로 뻗어 나간 아치형 천장, 그리고 창문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은은하게 부서져 내리는 여름의 빛줄기까지. 내부를 꽉 채운 낡은 나무 냄새와 특유의 고요함은 종교를 떠나 누구에게나 위로를 건네는 듯했습니다. 그 신성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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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밖으로 나와 박물관과 베네딕트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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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이기도 한 공세리성당 박물관(구 사제관)으로 들어섰습니다. 이곳 역시 촬영 금지 구역이라 눈으로만 찬찬히 둘러보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정말 뜻밖의 귀한 인연을 만났습니다. 마침 이곳의 산증인이신 87세의 지긋한 어르신을 우연히 뵙게 된 것입니다. 어르신은 낯선 여행객에게 기꺼이 이 공간에 얽힌 생생한 옛이야기들을 보따리 풀듯 들려주셨습니다.


    어르신의 이야기에 따르면, 공세리성당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공세리(貢稅里)'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원래 조선 성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충청도 일대에서 거둔 세곡을 모아 한양으로 운송하던 조창(세곡 보관 창고)인 '공세창'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1890년, 이 역사적인 창고 터 위에 천주교 본당이 설립되면서 세금(육신의 양식)을 모으던 곳이 영혼의 양식을 나누는 성소로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어르신의 눈을 반짝이게 했던 건 드비즈(Emile Devise) 신부님의 이야기였습니다.

    1895년에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한 프랑스 출신의 에밀 드비즈(한국명 성일론) 신부님은 지금의 고딕 양식 성당을 직접 설계하고 지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가난하고 병든 조선 민중들의 든든한 의사였다는 점입니다. 프랑스에서 배운 의학 지식과 한방 의학을 결합해 직접 고약을 만들어 종기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습니다. 훗날 신부님은 자신을 돕던 심부름꾼 이명래에게 그 비법을 전수해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국민 약, '이명래 고약'의 탄생 비화였습니다. 붉은 벽돌 사이사이에 깃든, 조선 백성을 향한 푸른 눈의 신부님의 따뜻한 사랑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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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정의 끝, 베네딕트관에서의 휴식과 여운


    어르신께 건강하시라는 따뜻한 인사와 함께 깊은 감사를 전하고, 마지막으로 베네딕트관으로 들어섰습니다.

    과거 수녀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베네딕트관은 현재 피정(일상에서 벗어나 고요히 기도하는 일)의 집이나 성지 순례객들의 영적 휴식처로 운영되고 있는 공간입니다. 화려하게 꾸며진 공간은 아니지만, 정갈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세속의 시간을 잠시 멈춰둘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비 젖은 초록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방금 전 어르신께 들은 공세리성당의 100년 훌쩍 넘는 역사와 드비즈 신부님의 사랑을 천천히 되새김질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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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공세리성당은 아름다운 건축물과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상처 입은 민중을 품어 안았던 깊은 치유의 역사를 숨 쉬듯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장맛비가 씻어내고 간 그 투명하고 짙은 초록빛의 위로가 필요하시다면, 공세리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건 어떨까요? 그곳에 서 있는 350년 된 느티나무가 언제나 그렇듯 다정하고 넓은 품으로 당신을 안아줄 것입니다.



    아산 공세리성당

    ○ 장소 :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 

    ○ 문의 : 041-533-8181

    ○ 관람료 : 무료

    ○ 주차비 : 무료

    * 취재(방문)일 : 2026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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