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저는 걷기에 푹 빠져 있습니다. 예전에는 목적지까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얼마나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걸음을 옮기는 순간부터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작은 발견들이 쌓여 걷기의 매력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내포천주교순례길 3코스인 삽교성당에서 충의사까지의 길을 걸었습니다. 내포천주교순례길은 단순한 둘레길이나 트레킹 코스가 아닙니다.
한국 천주교의 역사와 신앙 선조들의 삶, 그리고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까지 함께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길입니다. 그래서인지 출발 전부터 설렘이 남달랐습니다.
순례의 시작점인 삽교성당에 도착했습니다. 성당 앞에 서니 차분함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성당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오늘 걸어갈 길을 바라보았습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는 잠시 멈추어 서 있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순례길의 시작은 그 자체로 쉼이 되었습니다.



삽교성당을 뒤로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시골길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자동차로 지나쳤다면 절대 보지 못했을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담장 아래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들꽃, 오래된 담벼락에 기대어 자라는 넝쿨, 바람에 흔들리는 벼의 움직임, 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의 모습, 전봇대 위에 앉아 쉬고 있는 새 한 마리까지도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차를 타고 지나갈 때는 목적지만 보입니다. 하지만 걸을 때는 과정이 보입니다.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불과했던 것들이 걸을 때는 하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어느 집 마당에는 잘 익은 고추가 널려 있었고, 또 다른 집에는 정성껏 가꾼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삶이 담긴 풍경들이 길 위에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주변의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람 소리, 새소리, 풀벌레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농기계 소리까지 모두가 하나의 배경음악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어폰을 끼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내포천주교순례길은 신앙의 길이기도 합니다. 과거 천주교 박해 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걸었던 길이며, 해미읍성으로 압송되던 길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평화롭고 한적한 길이지만 그 길을 걸었던 신앙 선조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의 저는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들고 걷고 있지만, 당시의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 속에서도 이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평범한 길도 결코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걷는 동안 가장 좋았던 점은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는 해야 할 일들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걸을 때는 다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나 자신과 대화하게 됩니다.
최근의 고민도 떠올려 보고, 앞으로의 계획도 생각해 보고,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기도 합니다.
신기하게도 답답했던 생각들은 걸을수록 정리되었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사람들이 왜 걷기를 추천하는지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길 중간중간 만나는 풍경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넓게 펼쳐진 논은 초록빛 물결을 만들고 있었고, 하늘에는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벼들이 일제히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자연이 만들어내는 공연 같았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갔다면 10초도 보지 못했을 풍경이지만, 걸으며 바라보니 한참 동안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걷기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이런 것 같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누리는 것입니다.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하늘의 구름 한 조각, 바람의 방향까지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걷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맨발 걷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직접 황톳길을 걸어보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비록 순례길을 걷느라 운동화를 신고 있었지만 붉은 황토가 주는 따뜻함과 자연스러움이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황톳길 주변에는 푸른 나무와 풀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흙이 가진 특유의 색감은 자연의 생명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콘크리트 길과는 전혀 다른 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황톳길을 걷는 동안 문득 어릴 적 시골길을 뛰어다니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흙길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에 이렇게 자연 그대로의 길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반갑고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메타세쿼이아길과 황톳길 모두 '쉼'을 선물해 주는 공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순례길은 단순히 이동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울창한 나무 아래에서는 마음이 차분해졌고, 황톳길에서는 자연과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몸은 걷고 있었지만 마음은 쉬고 있었습니다.

이번 내포천주교순례길 3코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구간 중 하나는 예산의 메타세쿼이아길과 황톳길이었습니다.
걷기 전에는 그저 순례길 중 한 구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직접 걸어보니 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추천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메타세쿼이아길에 들어서는 순간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늘 높이 곧게 뻗은 나무들이 길 양옆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마치 자연이 만들어 놓은 초록빛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여름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며 길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들려주는 소리는 그 어떤 음악보다도 편안하게 다가왔습니다.
차를 타고 지나간다면 단 몇 초 만에 스쳐 지나갈 풍경이지만, 천천히 걸으며 바라보니 나무 하나하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굵은 나무줄기와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들,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까지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걸음이 느려졌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춘 것이 아니라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싶어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목적지보다 지금 걷고 있는 길 자체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순례길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충의사를 향해 걸었습니다. 충의사는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곳입니다. 천주교 순례길을 걸으며 신앙 선조들의 희생을 떠올리고, 마지막에는 윤봉길 의사의 독립정신까지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코스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충의사에 도착했을 때는 단순히 완주했다는 성취감보다 깊은 울림이 더 크게 남았습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윤봉길 의사의 삶,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던 순교자들의 삶, 그리고 그들이 걸었던 길 위를 오늘의 우리가 평화롭게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번 내포천주교순례길 3코스는 저에게 단순한 걷기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와 신앙, 독립정신을 배우는 시간이었고, 무엇보다 천천히 걸으며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걷는 속도가 느려질수록 더 많은 것이 보였습니다. 더 많은 소리가 들렸고, 더 많은 생각이 정리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소에는 지나쳤던 소소한 행복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삽교성당에서 충의사까지 이어진 길은 두 장소를 연결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바쁜 일상 속의 나와 진짜 나를 연결해 주는 길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계속 걸어보려고 합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삶 속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내포천주교순례길 3코스는 그런 걷기의 즐거움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걷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다음 순례길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포문화숲길 : https://www.naepotrail.org/course/info
내포천주교순례길 3코스
삽교성당 ~ 충의사
* 취재일 : 26.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