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은 북적이고 화려한 관광지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길을 자박자박 걸으며 고즈넉한 무드에 푹 빠져보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일상에 지쳐 위로가 필요할 때,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고 싶어지는 법이지요.

오늘 여러분께 소개할 곳은 싱그러움이 절정에 달한 6월 중순에 어울리는 곳, 바로 예산 이남규 선생 고택과 상항리 석불입니다.

1.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경이로움, 고택의 첫인상
한말의 지조 높은 선비이자 의병 활동을 돕다 순국하신 수당 이남규 선생의 생가에 발을 들이면, 가장 먼저 거대한 느티나무가 방문객을 압도합니다.
오랜 세월을 증명하듯 나무 밑동 속이 뻥 뚫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월의 푸른 잎을 무성하게 틔워내는 모습은 경이로움을 넘어 숭고함마저 자아냅니다. 고택을 멀리서 바라보며 이 느티나무 앞에 서면, 앞으로 만나게 될 가문의 묵직한 서사가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대를 이은 숭고한 희생, 수당 기념관
고택 산책에 앞서 먼저 발걸음을 향해야 할 곳은 수당 기념관입니다. 이곳은 구한말의 거유(巨儒)이자 절신(節臣)이었던 이남규 선생을 비롯해, 4대에 걸쳐 국가에 헌신한 숭고한 가문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공간입니다.

1대 & 2대 (이남규, 이충구): 의병 활동을 돕다 평택 평야에서 일본군에게 피살되며 함께 순국.
3대 (이승복): 신간회 등에서 활약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
4대 (이장원): 6·25 전쟁 당시 해병 중위로 참전해 원산 격전지에서 대대를 구하고 전사한 전쟁영웅.


한 집안에서 이토록 대를 이어 목숨을 바친 기록은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역사입니다. 기념관 내부에는 이남규 선생의 상소문 필사본, 고종황제의 하사품, 한말 지사들과 주고받은 수많은 간찰(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전후, 풍전등화 같던 나라의 운명 앞에서 지조 높은 선비들이 어떤 마음으로 붓을 들었는지 그 팽팽한 긴장감이 텍스트 너머로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3. 햇살이 그리는 한옥의 미학, 이남규 고택
인조 15년(1637년)에 지어진 유서 깊은 사대부 가옥인 고택은 정갈함 그 자체입니다. 유월의 정오를 지나며 수직으로 떨어지는 햇살은 밝은 나무 톤과 기와지붕이 빚어내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한옥의 수직·수평 미학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사랑채의 품격, 현판과 오륜목
사랑채에는 선비의 꼿꼿한 정신을 보여주는 세 개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평원정 (平遠亭): 막힘없이 멀리 내다보는 선비의 넓은 시야를 상징합니다. 6·25 전쟁 전 도난당한 권돈인의 명필 대신, 현재는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가 그 맥을 잇고 있습니다.
- 청좌산거 (請坐山居): "산에 살기를 청하다." 벼슬을 내려놓고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의 고고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 홍엽산거 (紅葉山居): 푸른 여름 속에서도 가을의 붉은 단풍을 미리 노래하는 옛 조상들의 멋스러운 풍류가 돋보입니다.

사랑채 앞 마당에는 오륜목이라 불리는 향나무가 든든하게 서 있습니다. 선비들은 이 나무를 거울삼아 "흔들림 없이 유교의 다섯 덕목(오륜)을 다하며 살자"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당당하고 열린 공간, 안채
보통의 상류층 주택이 ㅁ자형 구조로 안채를 폐쇄적으로 숨겼던 것과 달리, 이 고택은 모서리가 살짝 트인 '튼 ㅁ자형'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덕분에 초여름의 시원한 바람이 안마당을 휘감고 돌며 쾌적한 개방감을 선사합니다. 특히 외부에서 바로 알 수 있도록 안채 전용 중문을 정면에 당당하게 배치한 점은, 집안을 주체적으로 이끌었던 가문 여성들의 독립성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관람 포인트입니다.

4. 위기를 넘긴 다정한 미소, 상항리 석불
고택에서 동쪽으로 불과 100m 떨어진 산자락에는 숨겨진 보물, 예산 상항리 석불(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라 시대의 완벽한 비례미와는 다른, 고려 시대 특유의 파격적이고 친근한 미학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수몰 위기를 극복한 역사: 본래 천방산 계곡 아래에 있었으나, 1986년 방산저수지 건설로 수몰될 뻔한 위기를 넘기고 지금의 아늑한 돌담장 안으로 옮겨왔습니다.
독특한 판석 형태: 두께 12~15cm의 타원형 화강암 판석에 입체적으로 새겨진(부조) 형태라, 불교 조각사적으로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시골 아저씨 같은 정겨움: 넓적하고 큰 얼굴과 평면적인 몸, 다소 어색한 가부좌 자세는 오히려 투박한 매력을 줍니다. 아주 얕게 파낸 눈과 입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온화한 미소가 번져 있어 이웃집 아저씨를 만난 듯 정겹습니다.
화려한 광배 장식: 소박한 체형과 달리, 머리 양옆의 작은 부처(화불) 8구와 큼직한 연꽃 문양이 대칭으로 장식된 화려한 광배가 반전 매력을 선사합니다.

📝 마무리: 6월의 푸름 속에서 만나는 위로와 긍지
예산 이남규 선생 고택과 상항리 석불로 떠나는 여정은 속이 텅 빈 채로도 푸른 잎을 내는 느티나무처럼, 모진 역사의 풍파 속에서도 4대에 걸쳐 나라를 지켜낸 한 가문의 단단한 긍지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다정한 미소를 건네는 상항리 석불은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묘한 위로를 안겨줍니다.
6월 중순, 예산의 고즈넉한 산자락으로 걸음을 옮겨보세요. 역사의 무게를 담은 바람과 정겨운 돌부처의 미소가 여러분의 지친 일상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것입니다.
예산 이남규 고택과 상항리 석불
○ 장소 :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334-2
○ 관람료 : 무료
○ 주차비 : 무료
* 취재(방문)일 : 2026년 6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