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을 비롯해 그의 묘역과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추사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어 하사받은 저택이며, 정조 10년(1786) 김정희가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곳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고택과 고택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조성된 김정희 묘 그리고 그 옆에 건립된 추사 기념관을 통해 추사의 유물과 발자취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금석학을 연구하여 독창적인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시켰으며, 그림과 시,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도 최고의 경지에 오른 다재다능한 인물입니다.
추사 고택

▲ 추사 고택
추사 고택은 장방형으로 둘러싸인 담장 안에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추사 영당 등 세 건물이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사랑채는 대문 가까이 동쪽에 자리하였고, 안채는 사랑채 뒤편 서쪽에 있으며 추사 영당은 안채 뒤 후원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선생이 여생을 마감한 이 고택에는 그가 일생동안 집필한 장서 수만 권이 있었지만 1910년 무렵 화재로 인해 불에 타 애석하게도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대문

▲ 고택 대문
고택의 대문은 일반 사대부 집의 형식을 따라 건축되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에 맞배지붕을 올리고 가운데 칸인 문은 좌우 칸보다 높게 한 솟을대문으로 하여 평문을 유지하였으며,

▲ 광(창고)
대문 좌우에는 행랑채 대신 판장문이 달린 광(창고)을 설치하여 서산에 위치한 정순왕후 생가나 경주 김씨 고택의 대문과 동일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고택 내부 전경

▲ 고택 전경
대문을 들어서면 남향을 한 사랑채가 먼저 보이고 그 뒤로 동향을 한 안채가 자리하였는데, 사랑채는 담장 없이 개방된 형태를 하였으나 안채는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건물을 담장처럼 세우고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대문에서 안채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사랑채 뒤에 설치하였습니다.
사랑채

▲ 사랑채
사랑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큰 사랑과 작은 사랑이 연결된 ㄱ자 평면으로 건축되었으며, 모든 기둥에는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주련이 달려있습니다.

▲ 사랑채 큰 사랑
대문을 향한 큰사랑은 2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으며 툇마루 끝 아궁이가 있는 쪽에 판장문이 설치되었고,

▲ 사랑채 작은 사랑
1칸 온돌방으로 구성된 작은 사랑은 3면에 문을 달았는데, 남향을 한 쪽에 竹爐之室(죽로지실) 모각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 작은 사랑 편액과 주련
竹爐之室(죽로지실)은 대나무 화로가 있는 방으로 다실(茶室)을 뜻하는데, 다산 정약용의 제자 황상에게 써주었으며 초의 선사는 이것을 편액으로 하여 전남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 걸었습니다.
작은 사랑 양옆 기둥에는 추사가 금석문을 찾아다닌 것과 경전 연구로 시에 소홀했음을 쓴 주련이 걸려있습니다.
호고유시수단갈(好古有時搜斷碣) 옛것이 좋아 때때로 깨진 비석을 찾아다녔고,
연경루일파음시(硏經婁日罷吟詩) 경전 연구하느라 며칠 동안 시를 읊지 못했네

▲ 사랑채 대청
큰 사랑과 작은 사랑 사이에 대청이 자리하였는데, 대청 한가운데 약장이 놓여 있습니다.
조선 사대부는 스스로 가족과 문중 나아가 지역 백성을 구휼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녔다고 생각하여 유학뿐만 아니라 동의보감이나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을 통해 기본적인 의학 지식도 갖추었으며, 약재를 보관하는 약장은 물론 약절구, 약탕기 등을 보유하여 약방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 해시계
사랑채 앞마당에 세워져 있는 돌기둥은 해시계로, 김정희 선생이 직접 제작하였으며 앞면의 글자는 김정희 선생의 아들 김상우가 석년(石年)을 추사체로 쓴 것입니다.
안채

▲ 안채
사랑채 뒤에 자리한 안채는 충청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ㅁ자 배치를 하였는데, 서산 정순왕후 생가나 경주 김씨 고택과 같은 형태로 당시 사대부에서 유행했던 방식으로 보입니다.

▲ 안채 중문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사랑채 뒤에 바짝 붙어 있기 때문에 외부인이 사랑채 앞 대문에서는 안채 내부가 보이지 않지만 중문에서는 안채 내부가 명확하게 잘 보입니다.

▲ 안채 내부 전경
물론 중문에서도 안방과 건너방은 직접 볼 수 없도록 대청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하였으며, 안방과 건넌방의 아궁이가 있는 곳에 협문이 설치되어 있어 안채에는 3개의 문이 있습니다.
한편, 이 안채는 왕족인 화순옹주가 생활했던 곳으로 안채에는 난방을 위한 아궁이만 설치되어 있고, 음식을 만드는 부엌은 안채 밖에 따로 두었다고 합니다.

▲ 우측 건물
안채의 우측에는 안방의 아궁이와 함께 그 위에 설치된 다락이 중문 옆에 마련한 광과 이어지면서 밑으로 작은 협문이 설치되어 있고,

▲ 좌측 건물
안채의 좌측에는 중문 옆에 행랑채를 두었고 아궁이 옆으로 우물이 있는 밖으로 나가는 협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안채의 모든 기둥에도 김정희 선생의 글귀로 제작된 주련이 걸려있는데 그중에 대팽고회(大烹高會)가 있어 주목됩니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최고의 요리는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최고의 모임은 부부, 아들, 딸, 손주이니라
이 글은 선생이 죽던 해에 마지막으로 쓴 절필로, 평소 그가 가족에 대한 애틋한 심경을 쓴 것으로, 이 글의 방서(傍書)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 된다. 비록 허리춤에 말(斗)만큼 큰 황금인(黃金印)을 차고 밥상 앞에 시중드는 사람이 수백 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제주도 유배 시절 부인 예안 이씨의 죽음을 맞이했던 선생이기에 부인 살아생전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소박한 음식으로 조촐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여한이 없었을 것입니다.
대팽고회의 원본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 안채 6칸 대청
안채 중앙에 자리한 6칸 규모의 육간대청이 실로 넓지만 내부에는 장과 뒤주만 놓아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추사 영당

▲ 추사 영당
안채 뒤편에 추사의 영정을 모신 추사 영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영당으로 가는 문은 안채 북쪽 담장을 따라 들어가는 정문이 있고,

▲ 영당 측문
또 하나는 안채 뒤 후원 담장을 따라 들어가는 측문이 있습니다.

▲ 추사 영당
조선 철종 7년(1856) 김정희 선생이 죽은 뒤 아들 김상우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의 민도리집으로 짓고,

▲ 추사영실 현판
김정희의 평생 벗인 권돈인이 추사영실(秋史影室)을 써서 현판으로 걸었으며,

▲ 김정희 초상화
김정희 선생의 제자 이한철이 대례복을 입은 김정희 초상화를 그려 봉안하였습니다.
현재 김정희 초상화는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되어 있고, 추사영실 현판 원본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이곳 현판은 무형문화재 박학규 선생이 제작한 복제품입니다.
김정희 묘

▲ 김정희 묘
고택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묘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 김정희 묘
봉분을 중심으로 앞에 상석과 향로석을 두고 좌측에 비석을, 앞쪽 좌우에 망주석 한 쌍만 세웠고 그 외 석상을 두지 않은 검소한 형태의 묘입니다.

▲ 망주석
무덤 앞에 세워져 있는 망주석 기둥에 위로 올라가는 다람쥐가 조각되어 있는데,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 영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불을 밝히기 위해 다람쥐가 올라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망주석 뒤에 있는 화분 형태의 석물은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입니다.

▲ 망주석
맞은 편 망주석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의 다람쥐가 조각되어 있는데, 아침이 되어 날이 밝아지면 불을 끄고 내려오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처럼 망주석에 조각된 다람쥐는 영혼이 하늘과 땅으로 왕래하며 하늘과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여 음양의 순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망주석 앞의 작은 석봉은 차일석(遮日石)으로, 봉분을 중심으로 네 귀퉁이에 놓여져 있는데, 제사 지낼 때 차일(천막)의 끈을 매다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추사 기념관

▲ 추사기념관
김정희 묘 옆에 추사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 김정희 초상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죽고 난 뒤 이듬해인 1857년에 선생의 제자 희원 이한철이 대례복을 입은 모습의 김정희 초상화를 그리고 상단에 선생의 벗인 권돈인이 찬문을 써 넣은 것으로, 1971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옹방강과 완원
조선 순조 10년(1810)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동지사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간 김정희 선생은 연경에서 당시 석학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교유하면서 금석문과 고증학을 비롯해 서화 등을 익혔으며 후에 선생은 완원의 제자라는 의미로 완당이라는 호를 썼습니다.

▲ 진흥북수고경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비각에 걸려있는 편액의 탁본입니다.
조선 정조 14년(1795) 무렵 조정에서 황초령비의 탁본을 빈번하게 요구하자 이를 귀찮게 여긴 그 지역 백성이 비석을 벼랑 아래로 떨어트렸고, 이후 40여 년이 지난 순조 32년(1832)에 북한산순수비를 발견한 김정희 선생은 절친 권돈인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자 비의 파편을 찾아 달라고 권유하여, 마침내 비석의 일부를 찾아 관아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리고 북청에 유배로 있던 김정희는 후배 윤정현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자 비를 원위치에 복원하여 세우게 하고 비각에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境)이라 써서 편액으로 걸었습니다.

▲ 추사 난맹첩
추사의 난맹첩 상권 첫 폭과 둘째 폭에 실린 그림으로, 이것을 보면 선생은 서예(書藝)뿐만 아니라 서화(書畵)에도 능(能)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좌측의 춘농로중(春濃露重)은 초봄에 핀 혜초를 그린 것으로 난맹첩 상권 둘째 푹에 실린 그림이고,
우측의 적설만산(積雪滿山)은 겨울의 눈보라를 견뎌내고 피어난 난화를 그린 것으로 난맹첩 상권 첫째 폭에 실린 그림입니다.

▲ 청련시경
이 현판은 김정희 선생이 추사체가 무르익은 만년에 쓴 글씨로 2019년 심훈가(家) 종손 심천보가 기증하였습니다.
청련(靑蓮)은 당나라 시인 이백의 호이고, 시경(詩境)은 시를 지을 만큼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장소를 말하는데, 이백이 시를 지을만한 뛰어난 장소를 의미하며 썼다고 합니다.
용궁리 백송

▲ 용궁리 백송
김정희 선생이 25세 때 청나라 연경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 묘 앞에 심은 것으로, 백송은 우리나라에서 번식이 어려운 몇 안되는 희귀한 나무라고 합니다.
이상으로 추사 고택과 기념관 등을 통해 김정희 선생의 발자취를 알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사 고택
○ 주소: 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 운영시간: 하절기(3월~10월): 09:00~18:00, 동절기(11월~2월): 09:00~17:00
○ 휴무일: 매주 월요일 휴관(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신정(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 휴관)
○ 입장료 무료
○ 주차 가능
* 취재일자: 2026년 2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