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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충남의 전통사찰 14. 고려의 국가사찰 논산 개태사(開泰寺)

하늘이 보호해 태평성대 기원한 태조 왕건의 꿈

  • 위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396
  • 등록일자
    2025.06.27(금) 21:12:51
  • 담당자
    휘리릭 (mch7775@hanmail.net)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

     

    후삼국 통일대업을 이룩한 고려 태조 왕건

    천년전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평화를 빌었던 그의 자리에 서봅니다.

    태조는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을까?

    전란 속의 고요, 불안 속의 평화.

    바람 한 줄기에도 그가 염원했던 역사가 실려 있는 듯,

    세월이 눌러 앉은 석조여래와 석탑에서는

    말없이 태조의 기억과 기도의 숨결을 전해줍니다.

    고려의 시간은 석불의 미소에 담겨져

    스스로 빛을 간직하며 내 혼자만의 소란을 내려놓습니다. 


    개태사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사면 천호리의 전통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입니다. 고려 초 창건된 기념비적 사찰이자 국가사찰이었지만, 오랜 시간 부침을 겪으며 번성했던 옛 사찰 인근에 새로 들어선 전각에서 천년고찰의 법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전경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전경


    개태사 창건연도는 많은 전통사찰과 달리 기록상 명확합니다.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의 지시로 4년여 역사 끝에 940년 완공되자 태조가 직접 낙성법회를 개최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전하고, 태조의 진영(眞影. 초상화)과 옷이 모신 진전眞殿) 사찰로도 유명합니다. 창건 당시 태조가 지은 소문(疏文. 부처 앞에 죽은 사람의 죄복(罪福)을 아뢰는 글)을 요약하면 “(고려 태조 19)백제를 정벌하여. 개태사를 창건하고 친히 원문을 지어. 백성의 백 가지 근심과 군사적 재난의 어려움을 부처님의 힘에 의탁하고, 하늘과 신령의 위엄에 의지해왔다. 지난 20여 년 전쟁에서 승리해 나라를 안정시키고 대업을 이루니 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의 도와주심을 갚기 위해 특별히 관사에 명하여 불당을 창건하고 산 이름을 천호(天護), 절 이름을 개태(開泰)로 정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국가사찰답게 하늘이 보호하고 태평성대를 연다는 의미로 산과 절의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고려 태조 왕건 상소문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고려 태조 왕건 상소문


    당시 왕건은 후백제 정벌에 87000 병사를 동원해 천안부와 일선군 등의 접전에서 승리했고 패배한 후백제왕 신검은 황산군(지금의 논산시 연산)에서 투항했습니다. 국가사찰로 창건된 개태사는 번성을 누렸지만, 점차 역사기록에서 잊히다 공민왕 때 관리가 찾아와 태조진전에 강화도 천도 여부를 점치거나, 옷과 옥대를 헌납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개태사는 단순한 사찰을 넘어 고려 개국의 상징이자 국왕의 정통성을 표상하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에 있으면서 다양한 유물들을 남겼는데 보물인 석조여래삼존입상을 비롯해 충남도 민속문화유산인 철확(철솥)’ 충남도 문화유산 자료 오층석탑, 충남도 기념물 개태사지석조등입니다. 국보로 지정된 리움미술관의 금동대탑과 부여박물관이 소장하는 청동금고도 개태사지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지. 주춧돌과 기와편이 발굴되어 있다.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지. 주춧돌과 기와편이 발굴되어 있다.

     

    하지만, 고려말에 들어서자 불교 역사적 쇠퇴기를 맞은 데다 공민왕 이후 왜구의 침략이 극심한 가운데 1376~1381(우왕 2~14)에는 개태사가 전란의 중심이 되면서 큰 피해를 당합니다. 이후 조선 초 불교를 우대한 세조에게 절의 승려가 큰 수정 2개를 헌상하며 일시적으로 중흥의 모습을 보였지만, 1438(세종 20) 연산 현청을 개태사로 옮기는 논의가 있다가 부적절성으로 무산되고, 대동지지(1656) 등에서는 전쟁 중 폐위되어 유적으로 남아 있다고 밝히는 등 17세기 이후 지리지 여러 곳에서 고적(古蹟)으로만 전해져 사찰의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19세기 중창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일제강점기 또다시 폐사됐다가 1934년 사설사암(私設寺庵) 도광사로 중창됩니다이 과정에서 개태사는 전형적인 가람배치와는 다른 모습을 갖기도 했는데 유불선(儒佛仙) 3교 합일의 대법으로 미륵불이 도래하는 용화세계를 지향하며 미륵불을 모시는 용화전(삼일지상정천궁)과 창운각에 단군상을 봉안하거나 충의전에 중국의 관운장을 모시는 사당이 지어졌는데 2008년 조계종에 소속되면서 전각이 정비되고 새로운 명칭 등 전통적인 사찰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기에 이를 비교해 설명하겠습니다가람 배치는 불전사물을 설치한 신종루(神鐘樓)와 오층석탑, 대웅보전이 일직선상에 위치한 가운데 이를 중심으로 왼편에 어진전과 극락대보전이 오른편으로는 ㅌ자로 배치된 종무소와 요사에 이어 삼성각과 우주정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어진전의 태조 어진과 청동상. 단군과 관운장도 함께 모셔져 있다.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어진전의 태조 어진과 청동상. 단군과 관운장도 함께 모셔져 있다.


    신종루는 예전에 정문 격인 일주문이 있었지만, 2014년 이를 헐어내고 아래층은 사천왕문을, 이 층은 종각 역할을 하는 지금의 중층 누각형 복합건물로 지어졌습니다. 사천왕문 좌우로 벽에 불화를 그려 대신하고 있습니다. 사물은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모두 최근에 조성한 것입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신종루와 사물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신종루와 사물


    대웅전 마당 한가운데의 오층석탑은 개태사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형적인 고려 형식으로 고려 중기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기단부가 파손되고 상륜부가 사라져 보수를 거쳤지만, 다행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탑신에는 면마다 2개씩의 우주를 나타내는데 지붕돌은 별개의 석재로 쌓았습니다. 지붕돌은 공통으로 낙수면 경사가 심한데 처마 끝이 치켜 올라가 있으며 1~3층까지 4, 4~5층은 3단으로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4층 탑신과 5층 지붕돌에 구멍이 있어 상륜부 시설이 짐작되지만 앞서 설명하듯 사라지고 지금의 모습은 보수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기단과 탑신부가 간결하고 수직적 상승감을 갖춘 구조로 이상적 비례감을 보여줘 고려 중기 이후 지방 석탑의 대표적 형식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오층석탑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오층석탑


    석탑 왼쪽의 팔각형 전각은 고려 태조 왕건을 모시는 어진전(御眞殿)입니다. 사찰의 전각은 불법을 모시는 건물에만 전(殿)을 사용하지만,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의 위상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 삼일지상정천궁과 공포 등 일부를 제외고는 구조가 거의 흡사해 옮겨 중축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진전에는 태조의 초상인 어진(御眞)과 청동상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단군이 오른편에는 관운장의 초상 및 칼 등 무기류 일부가 걸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내고 있습니다. 태조 청동상은 951년 나체상으로 제작되어 황제의 상징인 통천관을 쓰고 옷을 입혀 봉은사(북한 개성시) 진전 옥좌에 안치되었다가 조선이 개국한 이후 1429년 태조의 능인 현릉 옆에 매장되었는데 1992년 확장공사 중 출토된 것으로 이를 참고해 수당 김종국 화백이 새롭게 어진을 그린 것입니다. 단군 영정은 원래 정법궁(창운각)으로 불리던 전각의 불단에 석가여래좌상을 본존으로 모시고 그 옆에 봉안했던 것을 옮긴 것입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어진전.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어진전.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어진전의 태조 어진과 청동상.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어진전의 태조 어진과 청동상.


    이어 석조여래삼존입상을 모신 극락대보전은 전면 5, 측면 3칸 크기로 부석사 무량수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태조 왕건이 개국을 기념하여 직접 발원해 봉안한 불상으로 전해집니다. 본존불(아미타여래)을 중심으로 관세음과 대세기의 협시보살로 구성되었습니다. 삼존불이 아미타계의 구원을 상징하는 만큼, 왕권 안정과 국태민안을 염원한 정치·종교적 의도가 결합한 작품으로 비교적 거대한 크기입니다. 후삼국 통일 직후 불교 조각의 전환기를 보여주는 석불로 후기 신라 전통을 계승하면서 고려 특유 유연성과 현실감을 특징으로 고려 초 삼존불 형식의 전형으로 평가받습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극락대보전.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극락대보전.


    중앙 본존불은 높이 4.51m로 사각 연꽃대좌위에 서 있는데 뒷면을 제외한 삼면에 팔엽의 연화문이 복련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민머리에 이마의 백호가 뚜렷하고 얼굴은 둥근 형태입니다. 살짝 뜬 눈의 눈꼬리가 귀까지 이어지는데 길게 늘어진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코는 얼굴보다 약간 작은 편으로 입가에 천진한 미소를 담고 있습니다. 신체는 원통형에 손과 발을 유난히 크게 만들고 어깨와 가슴은 투박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오른손을 어깨까지 들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인가 잡은 듯한 모습으로 손가락은 파손된 것을 복원하였습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극락대보전 석조여래삼존입상.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극락대보전 석조여래삼존입상.


    좌협시 보살은 높이 3.84m로 본존불보다 약간 작은 크기지만 보살상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해 화려한 영락 장식과 옷 주름의 섬세한 표현 등 오히려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합니다. 어깨와 가슴이 좀 더 부드럽고, 팔찌와 천의(天衣) 자락에 장식무늬가 표현되었고 우협시보살(높이 3.72m)과 세부적 묘사만 조금 다를 뿐 비슷한 모습입니다. 이들 협시보살은 보살상으로는 드물게 시무외여원인수인이 특징입니다. 좌협시보살의 오른손은 여원인(다섯 손가락을 펴고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는 손 모양)으로 부처가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도록 들어주는 수인을 하고 있으며, 왼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높이까지 올린 모습)으로 부처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고 위안을 주는 수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협시보살은 이와 반대로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왼손이 여원인으로 본존불을 사이에 두고 대칭형상을 만들었습니다. 협시불 이마의 백호는 개태사 재건(1930년대) 당시 새롭게 만든 것입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극락대보전 석조여래삼존입상 상반신.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극락대보전 석조여래삼존입상 상반신.


    대웅보전(大雄寶殿)은 기존의 정법궁(창운각)을 해체하고 최근 신축한 것으로 배면에 벽장을 두는 방식으로 내부 공간을 확장했습니다. 불전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지장불과 약사여래불이 협시하고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대웅보전.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대웅보전.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대웅보전 불전.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대웅보전 불전.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대웅보전의 화려한 단청.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대웅보전의 화려한 단청.


    삼성각은 예전에 삼일지상정천궁이 있었던 자리로 석불좌상의 좌우에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를 봉안했습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삼성각.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삼성각.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삼성각의 독성석상과 산신, 칠성탱화.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삼성각의 독성석상과 산신, 칠성탱화.


    개태사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철확(鐵鑊. 철솥)으로도 유명한데 우주정에서 보호중입니다. 크기가 직경 289, 둘레 910, 높이 96, 두께 3에 달합니다. 절에서 장()을 담글 때 사용된 것이라는데 고려 시대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란이나 가뭄에는 백성들의 구휼 용도로 사용되어 단순히 조리도구인 민속유물을 넘어 지역사회 공동체의 상징물이자 비상시 대비체계는 물론 제사에 사용된 문화유산으로 해석됩니다. 이처럼 구휼과 제의의 이중적 역할은 고려 불교의 사회적 실천 이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상징적으로는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지향한 호국 민생의 상징물로 개태사가 단순 종교시설을 넘어 국사찰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우주정.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우주정.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우주정의 철확.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우주정의 철확.


    전승에 따르면 개태사 철솥은 왜구가 쳐들어올 때 물을 뜨겁게 끓여 적에게 쏟아 물리쳤다는 이야기와 함께 저승에 간 다음 염라대왕이 죽은 영혼에게 이승에서 개태사 가마솥과 관촉사 은진미륵을 봤냐?”고 묻는데 봤다면 칭찬을, “못 봤다살면서 그것도 한 번 안 보고 뭐 했냐며 버럭 화를 낸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철확이 연산읍 서쪽 냇가에 묻혀 있다가 발굴됐는데 1935년 시라이(白井)라는 일본인이 이를 탐내어 훔쳐 부산항까지 가져갔는데, 솥에서 사흘 밤낮 큰소리로 우는 소리가 나자 겁에 질린 인부들이 말리는데도 일본행 화물선에 이를 실으려던 시라이가 번개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해 4월 경성에서 열린 조선산업박람회에 전시됐다가 경성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했는데 전국적인 가뭄에 논산 주민들이 개태사 철확을 원래 위치로 옮겨줄 것을 요구했는데 열차에 실어 연산역으로 옮기자 갑자기 비가 쏟아져 그 해 풍년이 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철확은 논산시 연산공원에서 전시하다가 1981년 개태사로 돌아왔는데 이 같은 사연이 TV 프로그램으로 소개될 정도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우주정의 철확.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 우주정의 철확.


    개태사가 들어선 지역은 삼국시대 후기 신라군이 당과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략할 때 통과한 진격로인데 백제의 계백 장군이 5000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도 유명합니다. 이후에도 군사·교통의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으며 사찰을 지키기 위해 6의 토성이 있었고 승병이 주둔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개태사지는 현재의 개태사로부터 천호산 방면으로 직선거리 300m 가량 떨어진 곳에 빈터로 남아 있는데 1986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삼존석불전을 봉안했던 전각 등 6곳 이상의 건물터를 확인했는데 산록 하단부에 석축을 높이 쌓고 평탄하게 대지를 조성한 후에 건물을 올린 산지가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직사각형과 사각형 등 2기의 석조가 발굴되었습니다. 석조는 큰 돌을 넓게 파서 물을 받아 사용하는 일종의 물통으로 의식에 사용된 그릇을 씻는 용도인데 직사각형 석조는 통일신라 시대의 특징을 계승한 것으로 북쪽 면에 2, 서쪽 면에 1개의 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철솥과 함께 개태사의 규모를 짐작게 하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됩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지 석조.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지 석조.


    개태사지에서 발굴된 대표적 문화유산으로는 국보인 금동대탑을 들 수 있습니다. 10~11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크기와 화려한 의장, 정교한 묘사 등 고려 예술의 정수로 평가받아 2000원짜리 보통우표의 도안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금속으로 작은 불탑을 만들어 불당에 공양하는 풍습이 있는데 대개 크기가 높이 2030정도로 50를 넘는 경우도 드문데 이 탑은 155로 현존하는 금속제 소형 불탑 가운데 가장 큽니다. 원래 7층으로 지금보다 더 컸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금동탑은 2층 기단과 그 위의 5층으로 남아 있지만, 원래는 7층으로 추정되어 현재 크기보다 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청동으로 만들고 위에 도금을 입힌 것으로 오랜 세월 동안 금빛이 다소 바랬지만, 여전히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작기법은 탑의 각 층을 따로 주조한 뒤 합친 것으로 고려 시대 목탑과 석탑 양식 모두를 사용해 기단과 머리 장식에서는 석탑의 흔적을, 난간이나 지붕에서는 목탑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지에서 발굴된 금동대탑과 이를 모델로 제작된 우표.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지에서 발굴된 금동대탑과 이를 모델로 제작된 우표.


    금동대탑은 개태사가 폐사되면서 땅속에 파묻혀 일부 손상을 입었지만, 장식들의 세밀하고 화려한 치장으로 유명합니다. 기단 하층에는 연꽃잎을 새기고 상층은 난간과 1층 탑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1층에서는 문과 창을 세밀하게 조형했고 2층부터는 지붕 위 난간 안쪽 탑신에 불상을 새겼습니다. 2층은 부처 4좌를, 3층과 4층은 3좌를, 5층에는 2좌를 각각 새겨 층의 크기에 맞게 불상의 숫자도 줄어들고, 층마다 지붕에 기와와 처마, 추녀마루 위에 잡상을 묘사했습니다. 일부 추녀 끝에 풍경이 달리고 5층 지붕에는 용머리 두 개가 남았는데 원래 모든 층 추녀에 용머리와 풍경이 달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문제는 금동대탑이 정식적인 학술 발굴로 출토된 것이 아니라는 점인데 현재는 리움미술관이 보유 중으로 개태사는 반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별도로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지. 전각에 사용된 주춧돌이 발굴되어 있다.

    ▲ 전통사찰 논산 개태사지. 전각에 사용된 주춧돌이 발굴되어 있다.


    또 다른 발굴품으로는 개태사지 석조가 있던 건물지에서 발굴된 금고(金鼓)로 현재 부여박물관에 소장 중입니다. 금고는 금속으로 만든 북으로 법당 내 걸어두고 법회나 의식 집행에 사용하는 것으로 금구(金口) 또는 반자(飯子)라고도 부릅니다. 개태사지 금고는 지름 102로 고려 시대 금고 가운데 가장 큰데 앞면은 모두 6개 원형 띠로 구분하여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들을 가득 나타냈습니다. 중앙 당좌는 직접 북채가 닿는 부분으로 연꽃의 자방에 18개의 연과가 있습니다. 당좌의 바깥으로 2줄의 가는 선을 구획하여 사선의 문양띠를 촘촘히 새겼습니다. 그다음에는 8개 연화문을 규칙적으로 배열하고 3개 굵은 선으로 구분하였는데 이어 인동당초문으로 장식하고 끝에는 큼직하게 연꽃 16개를 돌리고 꽃 안으로 개구리 모양의 동물을 양각했습니다.

     


    <공주시 개태사>

    위치 :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계백로 2614-11 (041-734-8730)

    운 영 : 연중무휴 (일몰이전 관람 가능)
    입장 및 주차장 : 무 료

    취 재 : 2025623일 등

     

    < 참고문헌 >

    박종기. (2024). 개태사 화엄법회소와 보살계 제자 王建. 충청학과 충청문화, 67-89.

    민활. (2024).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의 보수·복원 경위와 조성배경에 관한 검토. 불교미술사학, 37, 75-103.

    황인덕. (2002). 연산 개태사 전설 연구. 한국민족문화, (19· 20), 1-62.

    오세덕. (2022). 고려 태조 왕건 사찰의 가람배치와 건축 특징. 문화사학, (58), 39-63.
    전통사찰총서 12 - 대전·충남의 전통사찰 1, 사찰문화연구원, 1999

    충청남도지정문화재해설집, 충청남도, 2001

    국가유산청 국가유산정보(https://www.khs.go.kr)

    충남디지털문화유산(https://www.chungnam.go.kr)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https://www.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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