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가운데 한 분이고 조선시대 문신인 매죽헌 성삼문 선생의 묘가 충남 논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의문이 들었다. 성삼문 선생의 묘소가 왜 논산에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고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수없이 익혔던 충절과 지조의 인물이란 생각이 들어 방문하게 되었다.

▲ 성삼문 제실 전경
성삼문 선생은 조선 세종 때부터 세조 대에 이르기까지 사간원 우사간, 집현전 부제학. 예조참의 등을 지낸 문신이다. 세종 20년(1438)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4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면서 관직을 시작하여 훈민정음을 만들 때 공로가 컸다고 한다.

▲ 신도비
묘소에 들어서니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충문공매죽헌성선생기도비(忠文公梅竹軒成先生祈道碑) 라고 적혀진 ‘신도비’와 선생의 제실인 ‘성인각(成仁閣)’이 보였다. 성인각으로 들어가는 무인문이 굳게 닫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아쉬웠다.

▲ 무인문
성 선생은 충남 홍주에서 태어났는데 아기를 낳으려 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들려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고 한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 등과 함께 이를 도왔으며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중국 명나라의 음운학자 황찬에게 열세 번이나 다녀오기도 해 한글을 펴내는데 공로가 많았다.

▲ 성삼문의 제실 성인각
단종 1년(1453)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으면서 그에게 내린 정난공신의 3등 칭호를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1454년 집현전 부제학과 예조참의, 1455년 예방승지 등의 직책에 올랐던 인물이다.

▲ 성삼문 묘로 향하는 길
1456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박팽년, 유응부, 이 개, 하위지는 처형당하고 유성원은 잡히기 직전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결하는 등 여섯 명이 참형당했다. 또한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살해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갔다. 성삼문의 일문도 멸족의 비운을 겪었다. 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동생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 맹년(孟年), 맹종(孟終)과 갓난아기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 묘비
성삼문은 당시 노량진역 부근에서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에 팔다리를 각각 묶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찢어 죽이는 거열형을 받은 것도 모자라 갈기갈기 찢긴 시신을 가지고 전국을 돌게 하였다. 성삼문의 시신을(다리 한쪽) 지게에 지고 현재의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의 산 고개를 넘던 인부가 “날도 덥고 무겁고 피곤해 죽겠네….”하면서 불평하자 지게에 짊어져 있는 성삼문의 시신에서 “그렇게 무겁고 귀찮거든 아무 데나 묻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한다. 인부는 혼비백산하여 지게를 벗어 던지고 도망가 주변에 살던 선비들이 성삼문의 시신을 근처 산에 매장하여 오늘날의 성삼문 묘소가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 고개를 오늘날 논산지역 사람들은 성삼문 고개라고 부른다.

▲ 성삼문 묘 앞
성삼문 묘는 둘레 30m, 지름 13m의 규모로 조성되었으며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놓을 수 있는 상석을 비롯하여 문인석, 돌기둥 등으로 이루어져 조금은 소박한 모습이었으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선생의 인품을 그대로 표현한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 성삼문 묘
묘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당시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지지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로 불러 왕으로 대접하지 않았고, "상왕(단종)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나으리를 임금으로 섬기겠소. 나는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않았소."라고 했다는 말을 되새겨 보았다.

▲ 성삼문 묘
그리고 성삼문 선생께서 일찍이 충정과 절의를 결심한 시와 형장으로 끌려갈 때 읊은 시가 귓전에 메아리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야 이셔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북소리가 이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어
황천길엔 주막도 없을 것이니
오늘은 뉘집 찾아 쉬어 갈거나

▲ 성삼문 묘
조선 숙종은 38세의 나이에 처형당한 만고의 충신을 신하들의 본보기로 삼기 위해 신원을 복원하여 관직을 복위하고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지방 수령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주게 하였다. 그 후 유림은 선생의 위 덕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음력 10월 그믐 이곳에서 묘제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 성인각 모습
성삼문의 묘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길 2-10
* 취재일 : 2025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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