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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서다

대한의 청년, 윤봉길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 9) 모자공장 직공이 되다

2022.08.26(금) 23:48:39도정신문(deun127@korea.kr)

상해에서 동생에게 보낸 편지(1931.9.9, 보물 제568호)

▲ 상해에서 동생에게 보낸 편지(1931.9.9, 보물 제568호)



윤봉길은 드디어 상해에 첫 발을 내딛었다. 1931년 5월 8일이었다. 비록 자신을 맞이해주는 사람은 없었으나 목적지에 온 것만으로도 무척 기뻤다. 

집을 나와 상해에 오기까지 14개월이 걸린 셈이다. 

청도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망망대해를 건너 상해까지 왔지만, 상해에서의 생활 역시 고단하였다. 그는 또 다시 타국의 광야에 버려진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상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고, 또 백범 김구와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대로 들떠 있었다. 먼저 거류민단사무소에 가서 신고를 하였다. 이곳에서 김구와 거류민단장 이유필 등을 만났다. 

윤봉길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자리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인삼 장사가 적은 자본으로 이익이 많다는 말을 듣고 인삼 행상에 나섰다. 

그러나 고객들로부터 거절만 당하고 부잣집 문지기들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기가 일쑤였다. 결국 아무런 수익도 남기지 못하고 인삼 행상을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쓰디쓴 행상 경험을 한 후, 이번에는 프랑스 조계에 있는 종품공사의 직공으로 취직하였다. 종품공사란 말 털로 모자를 만드는 공장을 말한다. 

윤봉길은 취직한 지 얼마 안 되어 직공들이 지식이 얕고 이해심이 적어서 사소한 일에도 서로 질투하고 싸우는 것을 보았다. 윤봉길은 친목회를 조직하고 회비를 걷어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여 직공들의 상식을 늘리고자 하였다. 또 새로 입사하는 직공들의 생활비에 보탬이 되도록 도움을 주었다. 남몰래 자신의 돈으로 생활이 어려운 직공들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친목회가 생긴 다음부터 직공들 간에 서로 싸우던 일은 그쳐졌다. 나아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분위가 조성되었다. 직공들의 그에 대한 믿음은 커갔으며, 친목회의 지도 아래 서로 단결하여 앞날의 생활을 보장받기를 희망하였다. 이에 따라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그런데 공장주는 오히려 직공들의 임금을 낮추고자 모자 한 개를 제조하면 4각 5푼하던 것을 3각 5푼으로 낮췄다. 

이에 윤봉길은 친목회 간부들과 공장주를 찾아가 모자 제조의 원료가격과 시장 판매가 등을 수치로 보여주면서 직공들의 임금을 원상회복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공장주는 오히려 윤봉길을 해고하였다. 직공들은 이 소식을 듣고 ‘윤봉길의 복직을 요구한다’, ‘임금 내리는 일을 취소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안창호 등이 주선하여 복직이 허용되는 듯하였으나, 중국인 공장주의 반대로 복직이 안 되었다. 

윤봉길은 종품공장에서 해직된 뒤에는 홍커우 시장에서 가게 하나를 빌려서 밀가루와 채소 장사를 하였다. 항상 남루한 옷차림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굽신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대로를 활보하였다.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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