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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최후의 결전, 노량해전

충무공 이순신 이야기

2022.07.05(화) 23:07:48도정신문(deun127@korea.kr)

노량해전 상황도

▲ 노량해전 상황도



1598년 11월 19일 노량 앞바다
조선 수군과 日 마지막 해전
가장 큰 전과, 이순신 장군 전사


1598년 8월 18일 일본의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일본에서는 조선에 있던 일본군 대장들에게 ‘화의(和議)를 성립시키고 11월 중순까지 귀국하라.’는 명령을 전달하였다. 이 사실이 조명 수군에게 알려진 것은 11월초였다. 

당시 순천 예교성전투(9.20~10.5) 후 흥양(현 전남 고흥) 나로도에 유진하고 있던 이순신은 11월 8일 도독 진린과 함께 다시 예교성을 향해 출전하였다. 11월 11일 묘도에 도착한 조명 수군은 일본군의 해상 탈출로 차단작전을 시작하였다.


탈출로가 막힌 일본군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로 부탁하여 14일 통신선을 남해에 주둔하고 있던 소 요시토시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이순신은 양쪽에서 협격을 당할 경우 위험하다고 진린에게 항의한 후 선제 기동을 하여 노량수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당시 조선 수군은 판옥선이 60여 척, 명 수군의 전선은 300척 이상으로 추정된다. 18일 자정에 노량수로에 도착한 이순신은 하늘을 우러러 ‘이 원수를 없앨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讐若除 死卽無憾)’라고 빌었다. 

11월 19일 새벽 2시경 시마즈 군이 주축이 된 일본의 구원군 300여 척이 노량수로 좌단에 도착하여 교전이 시작되었다. 명 수군은 북쪽에, 조선 수군은 남쪽에 배치되어 일본군의 서진을 막으면서 적을 관음포 쪽으로 유도하였다. 특히 북서풍을 이용한 화공전과 함께 치열한 근접전도 이루어졌다. 이순신과 휘하 장졸들은 생사를 도외시한 채 적극적으로 싸웠다. 

일본군은 조명 수군의 화공전을 당하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여 관음포 쪽으로 몰리게 되었다. 패색이 짙은 일본군은 퇴로가 막힌 관음포에서 필사적인 탈출을 기도하였다. 동이 틀 무렵, 관음포 입구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이순신은 적 총탄에 가슴을 맞았다. 이순신은 목숨이 다하는 순간에도 전황을 걱정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한 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순신의 유훈을 받든 군관 송희립은 전투 마무리를 잘 하여 적을 크게 물리쳤다. 비록 이순신을 포함한 장수급 10여 명이 전사했지만, 우리 전선은 겨우 4척이 분멸되었을 뿐 일본군은 장수급 30여 명이 전사하고 군선 200여 척이 분멸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노량해전은 7년 전쟁 중 가장 큰 전과를 거둔 결전으로서, 통쾌한 복수적 의미와 함께 전쟁의 참상에 망연자실해 있던 조선 백성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제장명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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