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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흰배롱나무 꽃 한창인 충남 청양 모덕사

2021.08.16(월) 10:53:32대로(dried@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대쪽같은 선비의 성품으로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다 유배 생활을 거듭하였고,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이 박탈되자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 싸운 대유학자 최익현 선생을 만나기 위하여 76주년 광복절을 맞아 충청남도 청양군 모덕사로 향하였습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면암 최익현 선생의 73세 때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이 초상화는 모덕사 영당에 봉안되어 있는데, 전 정산군수 채용신이 그린 진영(청양 백제체험 박물관 소장)을 이종상 화백이 모사한 것이라 합니다.

최익현 초상은 현존하는 관복 전신상 중 비교적 옛 방식의 초상화 기법이 적용된 사례로 유학자이자 의병장으로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최익현 선생의 풍모를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돌아가시기 1년 전의 모습이며 수많은 풍상을 겪었는데도 꼿꼿하고 날카로운 면모와 위풍당당한 모습에 위압이 될 정도입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면암 최익현 선생을 모신 모덕사는 공주시 우성면 우목저수지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청양군 목면에 속합니다.
고종황제가 내린 글 가운데 "면암의 덕을 흠모한다."라는 구절에서 "모(慕)"자와 "덕(德)"자를 취하여 모덕사(慕德祠)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지막한 산기슭에 자리한 모덕사에는 붉은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와 흰 배롱나무가 어울려서 멋진 광경을 연출합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모덕사 안에 꽤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바로 차를 몰고 커다란 대문 안으로 들어가 세웁니다. 최익현 선생 동상을 둘러싸고 흰 배롱나무꽃이 만발하였습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 지정된 모덕사에는 영당과 사당, 고택인 중화당, 유물전시관인 대의관, 면암 선생의 서적 등이 보관된 춘추각 등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마침 제76주년 광복절이라서 (사)면암최익현선생기념사업회에서 조촐한 기념식을 진행하였지요.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하여 소수만 참여하여 참배하고 헌화를 하였습니다.

최익현 선생의 기거하셨던 중화당 앞에 마련된 가설무대에는 척사위정(斥邪衛正) 존심명리(存心明理)라는 최익현 선생의 신념이 양옆에 세워져 있었지요. 척사위정은 위정척사라고도 하는데, 사악한 것을 배척하고 정의를 지키려는 성리학자 최익현 등이 주창한 사상이며, 후에 의병 활동 등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존심명리는 최익현이 젊은 시절 스승인 이항로가 써 준 글귀로 ‘마음을 간직하고 이치를 밝힘’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최익현 선생은 정신적 지주인 이항로 선생의 척사위정, 존심명리를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에 새기며 선비로서의 길을 걸은 것이지요.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최익현 선생이 남긴 유물을 보관 전시하는 대의관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지 않지만, 관리인께서 충남 도민 리포터를 믿고 잠시 문을 열어 주시고 친절하게 설명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신 보여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1833년(순조 33) 경기도 포천에서 최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최익현은 1836년(헌종 2)은 충북 단양으로 이주하였으며, 9살 때 김기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고 익혔습니다. 1843년(헌종 9)에 다시 부친을 따라 경기도 양평군으로 이주합니다. 그 후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으며 선비의 기개를 키워나갔습니다. 2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다양한 관직을 거쳤습니다.

최익현 선생 하면 우리는 먼저 최익현 상소를 떠올립니다. 최익현은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대원군에 맞서 나라의 쇄신을 강하게 주장하다 유배 생활을 반복하였으며 결국은 흥선대원군의 10년 독재를 무너뜨린 분입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최익현 선생이 쓰시던 사모와 부채 옷 등이 낙경민직이라는 글귀 밑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 낙경민직은 중국 고사와 관련된 글귀로 스승 이항로 선생이 어린 최익현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내리신 글귀라고 합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최익현 선생의 호문포단, 신발, 의자 등받이 등도 전시되어 있어 그분의 생전 모습을 보는 듯하였지요.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최익현 선생은 1876년,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수교를 강요하자 도끼를 메고 광화문으로 달려가 일본과 수호통상을 체결해서는 안 된다고 소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박제순을 비롯한 다섯 매국노를 처단하라고 소를 올리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맞서 싸우는 등 대쪽같은 성품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모덕사 대의관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된 ‘최익현 압송도’ 모사본이 걸려 있습니다. 화폭을 둘로 나누어 서로 다른 시공간의 장면을 담은 일종의 역사 기록화입니다. 1906년 6월 전라도 순창에서 체포된 최익현 선생이 서울로 끌려와 일본군 헌병 사령부에서 3년 형을 선고받고 부산을 거쳐 대마도로 압송되었던 사건을 압축하여 묘사한 그림입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최익현 선생은 불의에 굽히지 않고 목숨까지 내던지며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애쓰셨습니다. 수차례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다 유배되기를 반복하고,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우다 결국 체포된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로 압송되어 적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식음을 전폐하고 운명하였다 합니다. 대쪽 같은 선비의 성품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목숨도 아깝지 않게 버린 것이지요.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는데 사후에 받은 훈장이 이곳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이제 모덕사 곳곳을 돌아봅니다.
모덕사 영당 홍살문 옆에는 흰 배롱나무꽃이 만발하였습니다. 홍살문은 출입의 기능보다는 상징성이 더 중요한 문입니다. 문짝이 없이 두 개의 기둥 위에 삼지창이나 태극 문양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홍살문은 서원이나 향교, 능과 묘 앞에 설치되어 있는데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화살은 나쁜 액운을 공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던 영당의 삼문이 광복절 기념행사가 있어서 그런지 열려 있어서 동쪽 문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삼문은 사당이나 제실에 쓰는 문의 형식으로 가운데 문은 혼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제사를 모실 때만 열어두고 ‘동입서출’이라고 하여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은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오는 것이 예법이라고 합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나지막한 산 아래 자리한 영당의 담장 주변에는 흰배롱나무와 배롱나무, 무궁화 등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지요.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성충대의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모덕사 영당의 문도 열려 있었습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영당의 안에는 최익현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매년 4월 13일에는 이곳에서 청양군 주관으로 제향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영당 옆에는 또 하나의 삼문이 있습니다. 역시 동쪽 문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이곳에 ‘모덕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곳에는 면암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매년 음력 9월 16일 모덕회 주관으로 행사를 한다고 합니다. 모덕사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춘추각은 면암선생의 서책, 서간문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전적류 4023점, 서찰 및 고문 서류 1974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최익현 선생의 고택인 중화당입니다. 원래 최익현 선생이 태어난 곳은 강원도 포천이며, 어린 시절부터 부친을 따라 여러 곳으로 이주하며 공부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최익현 선생은 청양에 오래 머물며 제자들을 양성하였다고 합니다. 이 고택은 1900년 최익현 선생이 건립하였으며, 안채·사랑채·영모재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영모재는 최익현 선생의 재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로 이곳에서 유생들이 공부하기도 했다 합니다.

광복절에 항일구국투사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사진

영당 앞에는 '성충대의의사비'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비석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에는 최익현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쓴 '포고팔도사민'이라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아, 슬프다. 오늘날의 국사를 차마 어찌 말하랴.
아, 지난 10월 20일의 변은 전 세계 고금에 일찍이 없었다. 우리에게 이웃 나라가 있어도 스스로 결교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결교하니 이것은 나라가 없는 것이요, 우리에게 토지와 인민이 있어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대신 감독하게 하니, 이것은 임금이 없는 것이다. 나라가 없고, 임금이 없으니, 우리 삼천리 인민은 노예이며, 신첩일 뿐이다. 남의 노예가 되고 남의 신첩이 된다면, 살았다 하여도 죽는 것만 못하다.'
 
조선 말기 대학자이며 의병장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살신성인하신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적은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밝혀진 것만 해도 무려 39곳의 사우와 유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그분의 활동 무대가 넓었으며 그분을 기리는 후세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선생께서 충의로 행하신 구국 일념의 정신과 왜병에 나포되어 대마도에 구금되실 때 왜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버선 속에 흙 한 줌을 넣고 물 한 동이를 가지고 배에 오르시고, 구금 중에도 일본이 제공하는 음식을 거절하고 단식 끝에 순국하신 숭고한 충의와 절의 정신, 참으로 선생의 나라 사랑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진정한 사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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