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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보다 올곧았던 선비 이순신

내포칼럼-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2021.03.15(월) 22:29:57도정신문(deun127@korea.kr)

대나무보다 올곧았던 선비 이순신 사진



‘정여립 역모’ 전라도사 죽자
의리 다해 마지막 장례길 지켜
 
전 상관의 투옥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가 안부 묻고 살펴
 
세상의 미움·버림 받을지라도
인간의 도리 다한 의로운 선비

 
충무공 이순신만한 선비는 고금에 드물었다. 17세기의 대학자 백호 윤휴가 공에 관해서 쓴 글을 읽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하였다. 서모가 이순신의 서녀였기 때문에, 윤휴는 이순신에 관한증언을 폭넓게 수집할 수 있었다.

‘통제사 이 충무공의 유사’라는 글이 탄생한 배경이다(‘백호전서’, 제23권). 여러 사람의 증언을 바탕으로 썼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이순신은 젊은 시절부터 늘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면 몸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초야에서 농사짓고 사는 것으로 족하다.” 그는 처음 벼슬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 도리를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정여립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마침 이순신은 정읍(현 전북) 현감이었다. 전라도사 조대중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조사관들은 조대중이 이순신과 주고받은 편지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순신에게 몰래 알리기를, “그런 문서는 없애라”고 하였다. 이순신의 답이 걸작이었다. “내 편지에는 다른 말이 없다. 또 이미 거둬간 문서가 아닌가. 어찌 그것을 훔치겠는가?”

얼마 후 조대중이 매를 맞고 죽었다. 그 시신이 정읍을 지나게 되자 이순신이 통곡하며 영결하였다.

이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다. “조군이 죄를 자백하지 않고 죽었으니, 그가 유죄인지를 알 수 없다. 게다가 얼마 전에 전라도사를 지냈는데, 내 어찌 모르는 사람처럼 할 수 있는가?” 이순신의 반문이 그러했다.

정여립의 역모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역모 사건인지를 지금도 잘 알 수가 없다. 그 당시 호남에서는 많은 선비가 이사건 때문에 죽거나 심하게 곤욕을 치렀다.

조대중도 그 가운데 하나였던 것인데, 이순신의 태도는 시종일관 당당하였다. 그는 고인에 대한 자신의 의리를 다할 뿐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변함 없는 태도를 보여주는일화는 참으로 많다. 대신 정언신이 조정의 오해로 옥에 갇혀있었을 때였다. 이순신이 공무로 서울에 갔다가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감옥으로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다. 그가 과거에 자신의 상관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듣고 뜻있는 선비들이 이순신을 의롭게 여겼다.” 윤휴의 전언이다.

오해를 받고 세상의 버림을 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인간의 도리를 외면할 수는 없다. 이것이 이순신의태도였다. 의롭고 용기 있는 선비가 아니면 못 할 일이었다.

나중에는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대간의 공격을 받아서 그가 하옥되었을 때 옥리가 몰래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뇌물을 좀 쓰면 벌을 가볍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이순신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자 이순신이 크게 화를 냈다. “죽게 되면 죽을 뿐이다. 어찌 바른 길을 저버리면서까지 살기를 구할 수있겠느냐!”

요즘 말로 그에게는 융통성따위는 없었다. 신변의 안위를 위해서 타협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조선 선비의 장점이요, 또 보기에 따라서 단점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참 선비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누구나 배운 바였다. 하지만 그렇게 실천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순신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니 진정한 선비였다. 역사의 거울에 비친 충무공의올곧음을 되새기며, 오늘도 나는 흐트러진 옷깃을 바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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