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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 명필 김정희와 충청남도의 자부심

2021.02.27(토) 23:25:03임중선(dsllew87@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두 달 반 전인 작년 12월 6일, 예산군에 의미 있는 뉴스가 들려왔다. 추사 김정희가 쓴 국보 제180호 ‘세한도’를 비롯 평생 수집한 문화재를 기증한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님이 문화훈장 중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게 되었는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아마도 초등학생들도 아는 인물일 것이다. 그런 분이 충남 예산 출신이라는 점도 충청남도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추사의 소중한 유물을 기증해 후손들 누구나 볼수 있도록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니 훈장도 당연히 전해져야 할 것인데, 그 덕분에 우리는 이제 '세한도'와 같은 최고의 걸작을 박물관에서 직접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김정희 고택.
▲김정희 고택
 
김정희는 1786년에 예산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사과 과수원이 많은 용궁리는 예산 사과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 ‘추사고택’은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이 건립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한신은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영조의 사위가 된 인물이다.
  
추사를 제대로 알려면 추사고택을 방문하면 된다. 고택 주변에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묘, 추사기념관과 백송 등 추사에 관한 모든 것이 다 있으니까.
  
고택 정문
▲고택 정문, 추사의 위엄이 느껴진다
 
김정희 고택은 1976년에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고택 안채
▲고택 안채
 
고택은 솟을대문의 문간채, ㄱ자형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안채 뒤편에 김정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영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
  
4 김정희가 제작했다는 해시계다. 건물 전체가 동서방향으로 자리잡은 데 비해 돌기둥은 남북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앞면에 새겨진 글씨는 '석년'이다.
▲추사 김정희가 제작했다는 해시계
 
건물 전체가 동서방향으로 자리잡은 데 비해 돌기둥은 남북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앞면에 새겨진 글씨는 '석년'이다.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이다.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하여 막아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였고 안방과 그 부속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5 일금육경. 하나의 거문고와 6개의 경전이라는 의미의 현판으로 추사의 글씨이다. 현재 충청남도 무형문화ㅐ 50호로 지정돼 있다.
▲일금육경
 
'일금육경'은 하나의 거문고와 6개의 경전이라는 의미로 현판의 글씨는 추사의 것이다. 현재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50호로 지정돼 있다.
 
6 농상실. 농상은 방성이라는 별 이름이며 농상신정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농상실이다. 농상은 방성이라는 별 이름이며 농상신정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죽로지실.
▲죽로지실
 
고택 바로 옆에 있는 추사의 묘.
▲고택 바로 옆에 있는 추사의 묘
 
특히 고택의 기둥 곳곳에는 김정희가 쓴 주련(柱聯)들이 걸려 있어 그의 글씨체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주련에 새겨진 한문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 뜻과 가르침에 고개가 숙여진다.
 
추사고택 오른쪽에는 화순옹주의 홍문(紅門)이 있다. 이 홍문이 독특한 것은 조선왕조 500년사에 왕실 여성으로는 유일한 홍문이기 때문이다. 홍문은 주로 열녀 혹은 효부를 기려 조정애서 내려줬는데 그데 모두 다 일반 백성들에게만 주어졌다. 그러나 공주 즉 왕실의 여성이 홍문을 유일하게 받았으니 당대에는 큰 ‘이슈’가 아닐 수 없었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딸로, 김정희의 증조부가 되는 김한신의 부인이다. 김한신이 38세의 나이로 죽자, 화순옹주는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식 끝에 남편을 따라 죽어 훗날 홍문을 세운 것이다.
   
추사의 기념관
▲추사의 기념관
 
추사 동상
▲추사 동상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추사의 일대기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추사의 일대기
 
추사 연표
▲추사 연표
 
완당에게 보낸 간찰, 즉 편지다.
▲완당에게 보낸 편지
 
김정희 고택과 묘의 관람이 끝났다면 그 옆의 기념관으로 가서 더 많은 유물과 역사 공부를 할수 있다.
여기서 추사의 연표를 통해 볼 수 있는 일대기는 물론 추사의 정신세계를 고루 접할 수 있다.
  
기념관에는 추사가 생전에 전국 곳곳에 남겼던 수많은 글씨를 탁본 또는 모사본으로 만들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해 놓고 있어 그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수 있다. 그가 중국에 갔다 온 일, 거기서 보고 배운 내용, 제주도 유배시절 일, 만년의 활동상 등 다양하다.
  
추사가 대흥사 대웅전 옆 요사채에 써줬다는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
▲추사가 대흥사 대웅전 옆 요사채에 써줬다는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
 
추사 고택의 주련을 탁본해 목판으로 새긴 것들
▲추사고택의 주련을 탁본해 목판으로 새긴 것들
 
추사는 조선조 전체를 관통하는 최고의 명필가 중 한 명이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에 뛰어나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용방강·완원 등의 대학자들을 만나 금석학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던 것이 후일 그에게 큰 도움이 됐던 듯하다. 거기서 명필들의 필법과 금석문(金石文)을 연구, 추사체를 이루어 결국 서예가이자 금석학자로서 정치와 실학에 큰 족적을 남겼다.
  
충남인으로서 추사의 업적과 학문적 성취를 오늘에 다시 되새기며 추사의 삶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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