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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선생이 아픔을 극복한 방법

내포칼럼-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2021.01.15(금) 15:50:54도정신문(deun127@korea.kr)

명재선생이 아픔을 극복한 방법 사진


병자호란으로 모친 여의고
9세 때 상주의 도리 다해
 
슬픔을 잊고 국치씻고자
성리학·예학 연구에 몰두
 
조정의 부름을 거듭 사양
평생 벼슬길 오르지 않아
‘명재유고’ 후학양성 등불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는 명재 윤증의 고택이 있다. 고택을 다녀간 사람은누구나 격조 높은한옥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고택을 물려받은후손들은 선생의 유훈에 따라 이웃사랑을 힘껏 실천했다. 연간 수입의 3분의 1, 즉 1000석이나 되는 쌀을 해마다 가난한 이웃을위해 썼다고 한다.

명재 윤증은 어떤분이었기에 그런 가르침을 주셨을까. 선생에게는특별한 아픔이 있었다. 인조 14년(1636) 12월 만주족이 쳐들어와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그때 선생 가족은 급히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한 달 뒤 적이 강화도까지 들어왔다. 그러자 선생의 어머니 이씨 부인은 결심한 바가 있어 부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적의 손에 죽느니 자결하는 편이 떳떳할것입니다. 이렇게 뵙고 영결하려는 것입니다.” 부군이 외출하자 부인은 하인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는 스스로 목을 맸다.

소년윤증의 나이 겨우 9세요, 손위의누나도 10세에 불과했다. 윤증은 하인을데리고 모친의 시신을 거둬 임시로 묻었다. 8개의 돌을 가져다 사방에묻고 또, 숯가루를 뿌려 표시해 뒀다. 어린아이가 이처럼 차분하게 상주의도리를 다하자 듣는 사람마다 놀랐다.

강화도를 점령한 만주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조선사람을 포로로 삼았다. 적의 포로가 된 소년 윤증은 허리춤에 간직하고 있던 자그만 보첩을 꺼내서 누나에게 주며이렇게 당부했다. “만약에 서로 헤어지게되기라도 하면 누나는 이것을 신표로 삼기 바랍니다.”

적은 포로를 이끌고 한강을건너 보름가량 김포에 머물렀다. 그때 나라에서 적과 협상을 벌여 1500명의 포로가 우선 풀려났다. 윤증은 다행히도 자유의 몸이됐으나, 누나는 적의 손아귀를 빠져나오지못했다. 그는 만주로 끌려가게 됐다.

그는 보첩을 꺼내 보이면서 하소연했으나 누구도 도와주지 못했다. 그런데 의주에 이르렀을 때 소식을 들은어떤 관리가 적에게 몸값을 주고 소녀를 구해냈다. 어린 동생이 누나에게 준 문서 하나가 목숨을 살려냈다. 불의의 사태에 침착하게 대응하는 소년의 지혜가 예사롭지 않았다.

만주족의 침략으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윤증의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열심히 글을 읽었다. 선비인 그로서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고나라의 수치를 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공부뿐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의 학덕이 높아지자조정이 그를 찾았다. 하지만 윤증은 자신의 부족함을 이유로 세상에 나서기를 사양했다(현종 10년).

“정축년(인조 15년)의 난리에 신의 어머니가강화도에서 숨졌습니다. 효성이 부족해 비명에 어미를 잃었는데도, 저는 이처럼 구차하게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고 웃고 먹고 옷을 입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픕니다.”

조정에서는 높은 벼슬을 주고 여러 차례그를 불렀으나, 윤증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오직 자신의 부족함을질책하며 성리학과 예학 연구에 더욱 정진했다. ‘명재유고’를 비롯한 그의 저술은 후학에게 큰 등불이 됐다. 그만하면 공로가 커도 너무 크지않은가. 하얀 눈이 곱게 쌓인 노강서원(논산시 광석면 오강리) 뜨락에서 잠시 선생의 높은 뜻을 헤아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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