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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선각자 ‘이지함’

내포칼럼-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2020.06.25(목) 16:45:48도정신문(deun127@korea.kr)

시대의 선각자 ‘이지함’ 사진



‘토정비결’ 저자로 알려진 이지함
영조 때 학자이자 뛰어난 호걸
 
학문 뛰어난 친구사귀려 유람
현실정치에 관심 많았던 선비
 
선조 때 기근이 들자 영남 찾아
난민을 수용하고 수공업 가르쳐
 
시대 한계 벗어나상업 등 중시
유교지식에 치중했던 과거제 비판


보령에 가면 아름다운 청천 호수가 있다. 둘레길을 거닐면 발걸음이 저절로 화암서원에 닿는다.

유서 깊은 이 서원에서는 토정 이지함과 그 조카이자 제자인 이산보 등 학덕높은 여러 선비를제향한다.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저자로만 알려져 있으나, 실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요, 뛰어난 호걸이었다. 영조 때 좌의정을 지낸 이관명은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과 더불어 이지함을 가장 걸출한 선비라 했다.

외모부터가 매우 특별했다. 이지함은 키도 크고 체구도 건장했는데, 발도 무척컸다고 한다. 얼굴은 검고 둥글었으며 눈빛이 강렬했다. 목소리도 우렁차고 맑았다.

그는 여행을 좋아했는데 가끔 무쇠 갓을쓰고 다녔다. 길을 가다가 식사 때가 되면 갓을 솥 삼아 밥을 지었다고 한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이지함의 기이한 풍모를 그리워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네, 토정은 신선 되어/ 학을 타고 아득한 구름 길로 떠나갔다고’(이익, 성호전집, 제8권)
이지함이 전국을 널리 유람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산천을 두루 살펴볼 생각도 있었겠으나, 학문과 절개로 이름난 선비를 사귀는 데 목적을 뒀다고 한다.

성격이 쾌활하고 호탕했던 그는, 사소한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6년 5월 1일과 11년 7월 1일).

이지함은 현실정치에 관심이 많은 선비였다. “내가사방 100리의 고을을 다스린다면 가난한 백성을 모두 부자로 만들 수 있다. 풍속도 돈독하게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관직에 종사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이관명, 병산집, 제11권).

그래도 이지함은 유능했다. 선조 3년(1570) 영남에 심한 기근이 들자 그는 현지로 찾아갔다.

이지함은 큰 집을 지어 난민을 수용했다. 그리고는 갖가지 수공업을 가르쳤는데, 재주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는 짚신 삼는 법을일러줬다.

결과적으로, 누구나 하루에 쌀 한 말쯤은 벌게되었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나가자 그들은 모두 의식이 넉넉해졌다.

19세기의 문장가 이유원이 임하필기(제22권)에 소개한 설화다.

이지함으로 말하면, 시대의 한계를 벗어난 선각자였다. 그는 상업과 수공업을 중시했다. 농업에만 매달려서는백성들이 잘 살 수 없다는 점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조정의 꽉막힌 인재관도 안타깝게 여겼다.

선조 7년(1574)에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인재를 등용할 때는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재능과 특기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교지식만 요구하는 과거 시험으로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말년에 그의 제자 조헌이 스승을찾아왔다. 그날 밤 이지함은 제자에게하늘의 별을 보여주며 십여 년 뒤에 큰 전쟁이 일어날거라며 앞일을 걱정했다. “그대는 부디 학문에 힘써 나라를 구하라”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자 과연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조헌은 의병장이 돼 구국의 제단에 목숨을 바쳤다.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고하겠다.

여름뙤약볕을 피해 청천 호숫가에 늘어선나무 그늘에 숨는 재미가 적지 않았다. 어느덧 발길이 화암서원 앞에이르렀을 때 내 가슴에는 이지함의학덕과 인품을 흠모하는 마음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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