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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명기(名妓) 김부용

생생현장리포트-임재룡 온양신문사 편집국 실장

2020.05.06(수) 00:21:29도정신문(deun127@korea.kr)

조선의 3대 명기(名妓) 김부용 사진


지난 주말 지인과함께 전북 부안의매창공원에 잠시 들렀다. 원래 공동묘지였으나정비를 거쳐 현재는 도심공원으로 탈바꿈해 지역 주민들의 쉼터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이매창(1573~1610년)은 시문과 거문고 등에 뛰어난 황진이, 김부용과 함께 ‘조선의 3대 명기(名妓)’로꼽히는 인물이다. 이매창은 당대의 문사(文士)인 유희경·허균 등과 교유가 깊었고, 여러 권의 시문집을 남겨,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3대 명기 중의 한 명인 황진이는 워낙 널리 알려진 인물로, 북한에서도 이례적으로 그의 묘소를 크게 조성해 기리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예인(藝人)으로 존중을 받고 있는 것이분명하다.

이렇듯 조선의 3대 명기 중 두 명은 명성에걸맞게 이쪽저쪽에서 크게 대우를 받고 있는데 나머지 한 명인 김부용은 어떠한가.

운초 김부용(雲楚金芙蓉·1820~1869년)은 황해도 성천에서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태어났다. 4세 때 글을 배우기시작해 10세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을마쳤으나 10~11세에 잇달아부모를 여의는 바람에 퇴기의 수양딸로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됐다고한다.

12세에 기적(妓籍)에 올랐으나, 16세에 성천 군민 백일장에서 장원해 인기를 얻었으며, 19세에 판서를 지낸 김이양이 총애해 기적에서 빼내 소실로 앉혔다.

김이양이 죽자 당시 33세였던 김부용은남은 평생을 김이양을 그리며 수절했다고 전해진다. 그 자신은 죽으면 천안 태화산 기슭 김이양의 옆에 묻히고 싶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옆자리는 정부인의 차지가 되면서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넙티고개 건너 망경산(천안시 광덕면) 자락에 누웠으니 후대 사람들은 그 절개를 기려 그묘를 ‘초당마마의 묘’라고 불렀다 한다. 김부용은 한시 350여 수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필자가 오래 전부터 망경산-광덕산 연계산행을 하다 보면 부실하게 세워진 ‘부용묘’라는 이정표를 보기는 했다. 처음엔 그 부용이 어떤 인물인지를 몰라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뒤늦게 고인의 위상을 알아보고 예를 갖추긴 했지만 초라한 봉분을 보면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봄은 가고 꽃이 지니 야위는 얼굴 / 다시금 다듬어도 꽃답지 않네 / 못잊어 이 상사(想思) 못 버린다 해도 / 상봉보다 상사가 오히려 나은 것을 / 만났던 옛 정보다 그리는 정이 더 좋아라’
 
‘사랑은 움직이는것’이라며 지조를 헌신짝처럼 여기는 이 시절에 임을 그리는 정이 유달라 심금을 울리는 시문을 무수하게 남긴 김부용. 조선 3대 명기이자 빼어난 문재(文才)를 지닌 예인에 대한 지역의 예우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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