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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봉곡사

2020.04.23(목) 10:39:10완두콩(maiiuy@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지만 집에만 있기는 너무 심심해서 가까운 곳을 검색하다가 아산 봉곡사를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보니 요즘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인지 우리 차뿐이었습니다. 바람도 많이 부는데 우리밖에 없으니 더 춥게 느껴졌습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주차를 하고 봉곡사로 향하기 전에 어느 관광지를 가더라도 항상 보게 되는 이용자 안전규칙을 보여주는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여덟 가지의 사항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꼭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었습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제일 먼저 마주한 곳은 천년의 숲길보다 봉곡사를 나타내는 돌비석이었습니다. 돌로 안내하니 왠지 더 견고하고 멋있어 보였습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아산 봉곡사 사진
 
아산 봉곡사 사진
 
진정으로 인터넷에서만 보던 봉곡사 천년의숲길을 직접 보니 왠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천년의 숲
봉곡사 주차장에서 봉곡사까지 약700m에 걸쳐 있는 소나무숲을 흔히 '천년의숲'이라고 부르며 수년 전 산림청 주최 아름다운 거리숲 부문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바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숲입니다. 여기에 있는 소나무는 역사적인 아픔을 간직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름드리 소나무 밑둥에는 한결같이 V자 모형의 흉터가 있는데, 이는 일제가 패망 직전에 연료로 쓰고자 송진을 채취하려고 주민들을 동원해 낸 상처입니다. 언뜻 보면 소나무가 웃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보는 이들의 마음이 더 저리다고 합니다. 인간은 나무들에게 해를 끼치기만 하는데, 나무는 인간에게 한없이 배풀기만 한다는 것을 여기 와서 한 번 더 깨닫게 됩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아산 봉곡사 사진
 
처음에 소나무에 상처가 있어서 뭐지 궁금했었는데 올라오기 전에 읽었던 내용이 기억나서 다시 가까이 가서 소나무에 난 상처를 보니 저도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늘끝까지 쭉쭉 뻗은 소나무를 볼 때 어떻게 저렇게 자랐는지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소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어서 감탄을 금치 못 했습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지나다 보니 여기저기 사람들 한 명 한 명 소원을 담아 쌓아올린 돌무덤이 가득했습니다. 소원을 담은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지고 저도 마음 속에 담은 간절한 소원을 담아 돌멩이 하나 주워서 돌무덤에 올렸습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한 20분 정도 걸어가다 보니 봉곡사에 다다르기 전에 봉곡사를 찾은 사람들이 전통사찰의 존엄 및 수행 환경이 훼손되거나 방해받지 않도록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라는 내용의 안내판이 있었습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아산 봉곡사 사진
 
봉곡사 앞에 4월 30일 부처님오신날 연등 접수를 받는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부처님오신날 행사가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서 코로나19가 끝이 나서 마음껏 봉곡사나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플래카드 밑에는 이곳은 희귀동물서식지임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봉곡사 입구 들어가기 전에 왼쪽에 돌계단이 있어서 돌계단을 따라 걸어올라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바로 만공탑이 있었습니다.

만공탑
봉곡사에서 만공스님이 스물다섯 되던 을미년(1895년) 7월 25일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하고 일원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공부를 흐트리지 않고 하룻밤을 지나던 중 새벽 종송을 할 때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를 외우다가 문득 법계성을 깨달아 화장찰해가 홀연히 열리니 스님은 다음과 같은 오도성을 읊었다고 합니다. 만공탑은 '세계일화'는 만공스님의 친필입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봉곡사
봉곡사는 신라51대 진성여왕 원년(887년) 도산국사가 창건했으며 산이 봉의 머리와 같다 해서 '봉수산'이라 하고 절은 이 산위에 베틀바위 전설로 유명한 돌석자를 붙여서 '석암'이라고 칭했습니다. 고려 18대 의종 때 보조국사가 중창했으며, 세종조(1419년)에 함허대화상이 중창하였는데, 당시 암자만도 상암·벽련암·보조암·태화암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 14대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본전과 여섯암자들이 전부 폐허가 되었다가 16대 인조24년(1647년) 다시 중창했습니다. 그 후 22대 정조 18년(1794년) 궤한화상이 중수한 뒤 산이름을 태화산으로 바꾸고, 이 산이 봉이 양쪽 날개를 펼치고 나는 것과 같다 하영 봉곡사라 지칭하였습니다. 조선왕조 26대 고종7년(1891년) 서봉화상이 법당 및 요사를 종수하여 현존하고 있으며, 그후 만공선사께서 을미년(1895년)7월에 문득 법계성을 크게 깨달아 오도송을 읊으시어 유명한 성지로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아산 봉곡사 사진
 
아산 봉곡사 사진
 
봉곡사의 대웅전과 고방이 다른 절과 다르게 아담하고 작아 보였지만 저는 웅장하고 큰 것보다는 봉곡사 절간이 조용하고 깊이있는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봉곡사의 대웅전과 고방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전각입니다. 이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건물로 주심포 양식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널빤지를 달았으며, 처마는 겹처마입니다. 내부의 구조는 간략한 닫집 형태이고 나무는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 이용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폐허된 것을 인조 24년에 고쳐지었으며, 1891년 고종 7년에 서봉화상이 수리하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고방은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2층 형태로 되어 있으며 대웅전 옆의 80칸의 'ㅁ'자의 요사채 건물 중 일부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입니다. 이 사찰은 887년 51대 진성여왕 원년에 도선국사가 처음 지어 '모연고찰'이라 하였고, 고려1170년 의왕 4년에 보조국사가 다시 건립하고 절 이름을 '석암사'라고 하였습니다. '봉곡사'라 불리운 것은 조선 1794 정조 18년입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봉곡사 입구에는 약수터도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서 그런지 더 맑고 깨끗해 보여서 시원한 물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왠지 코로나19 때문에 꺼림직해서 참았습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약수터 옆에 보니 작은 사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어서 남편과 손 잡고 올라갔습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아산 봉곡사 사진
 
아산 봉곡사 사진
 
작은사당 옆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있었습니다. 작은 사당에 들어가서 절을 하려고 하니 먼저 오신 분들이 있어서 밖에서 기다리면서 주위를 구경하였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인지 지붕에 달려 있는 철종이 더 크게 울려퍼졌습니다. 전 철종 소리가 왠지 더 정겨운 소리 같았습니다. 앞에 먼저 오셨던 분들이 나오셔서 저도 남편과 같이 들어가서 경견한 마음으로 절을 했습니다.
 
아산 봉곡사 사진
 
아산 봉곡사 사진
 
아산 봉곡사 사진
 
내려오는 길에 왼쪽에 길이 있어서 가 보니 봉곡사솔바람길이었습니다. 이곳은 아쉽게도 출입이 불가능해서 사진만 찍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 다.
 
봉곡사솔바람길
봉곡사 아래 사방댐 입구에서부터 오돌개마을 위 사방댐까지 약 2km에 걸쳐 조성된 임도인데, 요철이 덜하고 주변 숲이 웅장해 산책길로 그만입니다. 중간에 다리쉼을 할 수 있는 원두막도 있고 길가에는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나 운치를 더해줍니다. 여타 코스가 왕복하기는 좀 버거운 것이 사실이지만, 이 임도는 그다지 멀지 않아 봉곡사 쪽에서나 오돌개마을 쪽에서 왕복이 가능하다는 편리함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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