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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주도한 염치면 백암리 만세시위

충남의 여성독립운동가 ②김복희·한연순

2019.03.05(화) 23:17:22도정신문(deun127@korea.kr)

 

천안 여학생들의 만세시위 모습

▲ 천안 여학생들의 만세시위 모습


 

산 정상에서 대한독립만세 외쳐

2500여명 참여 횃불시위로 확산

출소 후 부녀자 계몽운동 앞장

 

아산지방에서의 3.1운동은 3 11일에 시작하여 4 4일까지 25일간 전개됐다. 여성들이 주도한 3.1운동은 3 31일에 염치면 백암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였다.

 

백암리 만세시위를 주도한 김복희(金福姬) 1901년 아산군 백암리 구미동에서 부친 김윤필 씨와 모친 박 씨 사이의 3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김복희는 백암감리교회 부설의 영신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다 1915년에 이화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학했다.

 

김복희는 이화고등보통학교 제1회 입학생으로 진학했고 졸업반이 되던 해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다. 학생들의 만세시위 참여를 막기위해 일제는 3 10일 각 학교에 휴학령을 내려 학교에서 내몰린 김복희는 기숙사에서 나와 고향으로 내려왔다.

 

김복순은 교회 부설의 영신학교 교사인 대구 출신의 한연순과 아산 백암리에서 3.1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한연순과는 이전부터 친분이 있어 고향에 내려올 때면 자주 교류를 하며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김복희와 한연순은 서울에서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마을 유지들, 특히 백암교회 장로이며 마을에서 영향력이 큰 김상철 장로와 긴밀히 의논했다. 3 31일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주민들에게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인 방화산 뒷산으로 모일 것을 전달했다. 50여명 정도의 주민들이 뒷산으로 모이자 산꼭대기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당시 횃불 시위에 참여한 여성은 김복희와 한연순 둘 뿐이었다. 염치면 백암리의 횃불시위는 인근 마을로 번져 동리 산 50여개 소에서 2500여명의 시위대가 참여한 횃불시위가 일어났다.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자 온양온천에 주둔한 헌병대 12연대가 출동하여 산을 에워싸고 총을 쏘아대며 만세시위에 가담한 주민들을 체포하면서 시위대는 해산됐다. 이 때 김복희와 한연순도 헌병대를 피해 달아나다가 부상을 입었다. 한연순은 다음날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고 김복희는 근처 외숙모 집으로 피신해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헌병대의 집요한 수사로 두 사람은 시위주도 혐의로 체포되어 공주까지 끌려가 감옥에 투옥됐다. 당시 유관순도 공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 끝에 김복희는 징역 2개월, 한연순은 징역 3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김복희는 조사 과정을 포함하여 약 4개월 정도 감옥 생활을 하였다.

 

출옥한 후 김복희는 1921 3월에 이화여자전문학교 부설 유치원 보육과를 제3회로 졸업했다. 이후 남편을 따라 목회지인 강원도로 이주하여 유치원과 탁아소를 운영하며 유아교육과 농촌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후에 화성군 대한부인회 회장을 맡았고 수원 일대에서 농촌부녀자들의 계몽운동과 생활개선운동에 앞장서서 헌신했다.

/이명화 도산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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