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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의 명물이 있게 한 우리나라 1호 호두나무

이야기가 있는 충남의 나무 ⑧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

2014.02.02(일) 15:55:14탈론(malgmywoo@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천안 호두과자가 왔어요~’
 
예전부터 ‘천안하면 호두’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성립되어 왔다.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은 기차 안에서의 호두과자 판매하는 아저씨의 목소리를 여전히 향수처럼 기억하고 있다. 또 지금도 천안엘 가면 수많은 호두과자 판매점을 볼 수 있다. 언제부터 천안과 호두과자는 인연을 맺었을까?
 
천안이 호두과자로 유명한 이유는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호두나무가 천안에 있기 때문이다. 호두나무는 2000년 전 중국의 한(漢)나라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서 들여왔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몽골을 통해 처음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오랑캐의 나라에서 들어온 복숭아’라는 뜻에서 호도(胡桃)라고 불리다가 나중에 호두나무로 바뀌었다. 흔히 먹거리로 나오는 딱딱한 껍질의 호두는 열매의 씨앗 부분이고, 과육을 벗겨 내기 전의 호두는 작은 복숭아를 닮았다.
 
호두나무를 우리나라에 들여온 사람은 류청신(柳淸臣)이라는 통역 관리였다. 몽골어에 능통했던 그는 고려 충렬왕의 사신으로 원나라를 자주 찾았다. 그때 원나라에서 호두 맛을 알게 되면서 충렬왕 16년(1290) 9월에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돌아올 때 호두나무의 어린 나무와 열매를 가져왔다.
 
고향이 천안이던 그는 자신이 살던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집 앞에 씨앗을 심고, 묘목은 집 근처의 절 경내에 심었다. 지금의 천안 광덕사(廣德寺) 호두나무가 바로 그 묘목이 자란 나무다. 이 전하는 얘기가 맞다면 수령이 740여년 된 셈이다.

고려 통역관리였던 류청신이 호두나무 묘목을 가져와 광덕사 경내에 심었다고 한다.

▲ 고려 통역관리였던 류청신이 호두나무 묘목을 가져와 광덕사 경내에 심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호두나무 앞에 있는 비석에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된다고 적어놓고 있다. 300여년 차이가 나는데, 결국 지금의 나무가 그 때 심은 것인지는 정확치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곳 마을에서는 이것이 우리나라에 호두가 전래된 시초가 되었다 하여 이곳을 호두나무 시배지(처음 심은 곳)라 부르고 있다.
 
만약 호두나무의 수령 400년이 맞다면 임진왜란(1592년) 때 광덕사가 불에 타면서 류청신의 호두나무도 함께 타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 후 광덕사를 중건하면서 새로 심지 않았을까 추정해볼 수 있겠다. 어쨌든 이 나무는 문화적 생물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천연기념물 제 39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광덕산과 어우러져 있는 광덕사의 모습

▲ 광덕산과 어우러져 있는 광덕사의 모습


광덕사는 652년(진덕여왕 6)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였고, 숱한 중창을 거쳐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충청도와 경기도 지방에서 매우 큰 절 중의 하나였다. 사찰소유 토지가 광덕면 전체에 이르렀고, 89개에 달하는 부속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누각이 8개, 종각이 9개, 만장각(萬藏閣)이 80칸, 천불전(千佛殿)도 3층으로 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중수와 개수, 중창을 하였지만 1980년까지 사세가 계속 기울었다.

호두나무의 시배지인 광덕사는 652년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 호두나무의 시배지인 광덕사는 652년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중창하였는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7호로 지정된 천불전 안에는 천불이 그려진 가로 28자, 세로 35자의 거대한 후불탱화(後佛幀畵) 3점이 있어 총 3천불이 소장되어 있다. 또 이 절에는 진산이 832년(흥덕왕 7)에 가져왔다는 불치(佛齒) 1매와 사리 10과, 승가리(僧伽梨) 1령(領)과 불좌(佛座) 1병 등을 비롯하여, ‘금은자법화경(金銀字法華經)’과 ‘금자사적기(金字寺蹟記)’ ‘세조어첩(世祖御帖)’ 등의 귀중한 문화재가 있다.
 
금은자법화경은 6책이 보물 제390호로 지정되어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 있고 보물 제269호와 제270호로 지정된 마곡사의 금은자법화경도 원래는 이 절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금자사적기는 다른 데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시대 작품이며, 세조어첩은 1457년(세조 3) 세조가 온양 온천에 왔다가 이 절의 부처님 치아와 사리를 친견한 뒤, 광덕사와 개천사(開天寺)의 부역을 면제시켜주고, 위전(位田)을 사급(賜給)한다는 교지를 친서한 것이다.
 
이 절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는 진산의 부도 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부도 4기가 있으며, 천불전 우측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광덕사 일주문을 지나면 수령 440년의 느티나무가 있다.

▲ 광덕사 일주문을 지나면 수령 440년의 느티나무가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 100m정도 올라가면 일주문이 나오고 왼쪽으로 440여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이 느티나무를 돌아서면 광덕산 아래 광덕사의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 오래된 사찰답게 하늘높이 솟은 감나무가 있고 좀 더 가면 2층 누각인 보화루(普化樓) 앞에 웅장한 호두나무가 떡 버티고 서있다. 지상 0.6m 정도에서 2개의 가지로 갈라졌다가 다시 3가지로 뻗어나갔다. 광덕사 문턱을 넘나들었을 수많은 손님들을 마중하듯 호두나무는 그렇게 400여년을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감나무와 호두나무가 보화루 앞에 나란히 서있다.

▲ 감나무와 호두나무가 보화루 앞에 나란히 서있다.
 

고찰답게 오래된 감나무도 하늘높이 솟았다.

▲ 고찰답게 오래된 감나무도 하늘높이 솟았다.


보화루를 올라서면 대웅전이 보이고 대웅전 왼쪽 옆으로 보기 좋게 자라난 또 한그루의 노거수가 보인다.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가 생김새도 멋있다. 1500년 가까운 고찰은 이러한 나무들과 어우러져 품위를 더하는 듯 하다.
 

대웅전 옆의 수령 500년된 느티나무 자태도 멋있다.

▲ 대웅전 옆의 수령 500년된 느티나무 자태도 멋있다.


현재 광덕사를 포함해 광덕면 일대에는 대략 25만8000여 그루의 호두나무가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천안에서 생산되는 전체 양의 60%에 해당한다. 천안 광덕면은 토양과 햇빛, 온도 등 환경이 호두나무 생장의 최적지라고 한다.
 
고려에 호두나무를 들여온 류청신은 역사에서 생소한 이름이기에 목화를 들여온 문익점처럼 훌륭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류청신은 역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충렬왕이 원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한 덕분에 그는 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원나라 공주와 결혼까지 한 상태였기에 그의 권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보화루 앞에서 수많은 손님들을 맞이했을 호두나무의 자태

▲ 보화루 앞에서 수많은 손님들을 맞이했을 호두나무의 자태

 
그러나 그의 욕심이 도를 넘었다. 그는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진 자신의 권세를 더욱 키우기 위해 원나라의 힘을 빌리려 했다. 고려를 원나라의 일개 성으로 편입시키고자 한 ‘입성책동’이 그 사건이다. 그는 원나라 왕실에 이 같은 청을 올렸고, 이에 감복한 원나라 임금은 그에게 ‘훌륭한 신하’라는 뜻으로 ‘청신’(淸臣)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류비(柳庇)였는데, 이후 청신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계획은 이제현 등의 충신들에 의해 가로막혔고, 결국 원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에서 생을 다하였다.
 

둘로 나뉜 줄기의 둘레는 각각 2.5m가 넘는다.

▲ 둘로 나뉜 줄기의 둘레는 각각 2.5m가 넘는다.


그러나 그가 심은 호두나무는 그 생명을 더욱 키워나가 키가 18m까지 자랐고, 둘로 나뉜 줄기는 각각의 둘레가 2.5m를 넘게 자랐다. 농민들은 한 그루의 나무를 애지중지 키워 씨앗을 내고, 묘목을 내며 한 그루 두 그루 늘려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안은 호두의 명산지가 됐고, 호두과자는 전 국민의 먹거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비록 호두나무를 가져온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아름답지 않으나 호두나무의 가치를 알고, 이를 키워 가꿔나간 후손들과 농민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의 호두를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광덕사 호두나무로부터 시작한 천안의 호두는 이제 전국적 명물이 되었다.

▲ 광덕사 호두나무로부터 시작한 천안의 호두는 이제 전국적 명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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