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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의 극적인 사연을 안고 있는 절, 예산 보덕사

2013.09.26(목) 14:49:21대한독립만세(lkdfldf33@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보덕사. 우리나라에 크고 작은 수많은 사찰이 있는데 그중에 예산의 보덕사처럼 기구한 절이 또 있을까요.

보덕사라는 절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찾아가 보았더니 보덕사는 현재 비구니승만 계시더군요.

한문으로는 報德寺인 이 절.
한문의 음과 훈 그대로 덕에 보은한다는 의미를 안고 있는 연유에 대해 역사에 관심이 좀 있는 분들은 웬만큼 알고 계실것 같습니다.
 

보덕사

▲ 보덕사


한 많은 조선 말기 왕실의 운명이 전설처럼 서려 있는 역사적인 사찰 보덕사는 본래 충남 예산의 가야산 자락 옥양봉 남쪽 기슭에 있던 가야사를 승계하여 1871년(고종 8년)에 창건했던 절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이곳 가야사터로 이장할 당시 사용한 상여가 보관된 보호각.

▲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이곳 가야사터로 이장할 당시 사용한 상여가 보관된 보호각. 바로 옆에 이구의 묘가 있으며 이 상여와 보호각은 보덕사에서 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
 

보호각 안의 상여(남연군 이구를 이장할때 쓰인 것)

▲ 보호각 안의 상여(남연군 이구를 이장할때 쓰인 것. 겉의 유리 때문에 역반사 되어 사진 상태가 안좋습니다.)
 

상여의 바로 앞 50m지점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이구의 묘.

▲ 상여의 바로 앞 50m지점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이구의 묘.


보덕사가 가야사를 승계하게 된 연유는 이렇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왕손이 나올수 있는 자리가 이곳 가야사 터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절을 불태워 버린 뒤 자기 아버지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 것입니다.
결국 마침내 그 소원이 이루어져 고종과 순종이 모두 욍위에 오르게 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워 버린 죄책감과 두 아들과 손자가 왕위에 오른것에 대한 보답으로 현 위치에 절을 짓고 보덕사(報德寺)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보덕사는 남연군 묘로 가기 전 약 2Km 지점의 오른편 산에 있습니다. 6.25때 소실되었으나 1951년에 다시 중창하였다 합니다.
 

보덕사 경내 요사

▲ 보덕사 경내 요사. 트인 ㅁ자 형을 하고 있습니다.
 

요사 별당

▲ 요사 동별당
 

요사 옆의 서별당

▲ 요사 옆의 서별당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2층으로 된 서별당, 정면에 주지실, 오른쪽에 동별당이 있고, 연못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인데 극락전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입니다.

극락전 앞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3호로 지정된 석등이 있고 옆으로 관음전이 있습니다.
 

극락전

▲ 극락전
 

극락전 안의

▲ 극락전 안의 모습
 

극락전의 금동불상

▲ 극락전의 금동불상


보덕사 극락전입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가야사에는 금탑이라 불리는 빼어난 석탑이 있었고, 그 탑의 4면에는 돌로 만든 방이 있어 각각 돌부처가 모셔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절의 터가 흥선대원군에 의해 불태워지면서 이런 문화재들이 모두 소실됐다 합니다.
 

3층석탑

▲ 3층석탑


보덕사 삼층석탑입니다. 문화재자료 제17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근처의 가야사 터에 있었으나, 1914년 일본인이 몰래 반출하려던 것을 보덕사 주지의 항의로 돌려 받아 이 절에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2층의 기단 위로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을 올려놓은 모습인데, 처음에는 5층이었던 것이 훼손되어 안타깝게도 3층 까지만 남게 되었다 하메요.
 

석등

▲ 석등


보덕사 석등이고요, 문화재자료 제183호입니다.
보시다시피 전체적인 외형이 약간 불균형 합니다. 한눈에 알수 있듯이 이미 거의 절반이 없어지거나 훼손된채 사라진 상태여서 일부만 남아있는 원형에 새로 모양을 갖춰 세워놓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려놓는데, 이 석등은 현재 화사석만 남아있습니다. 8각을 이루는 화사석은 4곳에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창을 내고, 나머지 4면에는 4천왕상(四天王像)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꼭대기에는 둥근 돌이 솟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는데, 보덕사는 조선시대 후기인 고종 2년(1865)에 창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석등은 조각수법으로 보아 이보다 더 오래전에 세워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요사 뜨락의 털신

▲ 요사 뜨락의 털신
 

요사 안채의 부엌에선 아궁이에 불이 활활

▲ 요사 안채의 부엌에선 아궁이에 불이 활활
 

벽면의 절구

▲ 벽면의 절구


털신을 보니 가을이 확 깊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요사체의 아궁이에서는 장작불이 지펴지고, 벽면의 절구도 인상적입니다.
 

절 옆의 부도

▲ 절 옆의 부도
 

비구니법희선사탑비

▲ 비구니법희선사탑비


절 옆에는 이렇게 부도와 함께 절의 중창에 큰 역할을 했던 ‘비구니 법희선사탑비’가 있습니다.
 
구한말 기구했던 조선의 역사와 함께 생각잖은 운명을 맞이해야만 했던 가야사. 그리고 그 후신으로 다시 옆에 지어진 보덕사. 지금은 여스님들만 기거하는 작은 절이지만 그 역사적 의미와 숨은 뜻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해 줍니다.

풍수지리, 한 사람의 욕망, 부와 권세, 소중한 문화재의 훼손과 소실, 그리고 기구했던 대한제국의 운명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찾아온 암흑같은 세월의 역사,  돌이키기 싫은 일제 강점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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