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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4대명필 자암 김구선생을 아십니까?

중국인도 작품을 사 갔다는 김구선생 묘소, 효도 정려, 신도비가 예산에 있습니다

2013.09.09(월) 23:29:33유병화(dbqudghk30@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눈만 뜨면 컴퓨터와 스마트폰 만지느라 거기에 푹 빠져 사는 요즘 아이들. 그 덕분에 아이들이 쓰는 글씨를 보면 참으로 가관 그 자체입니다. 용인지 지렁이인지 삐뚤빼뚤 꼬불꼬불 뒤엉켜 날아가는 아이들 글씨를 보면 속이 터진다는 부모님들 많습니다.

그도 그럴만 한 것이 지금 아이들 키우는 부모님 세대의 어릴때는 컴퓨터 같은건 구경도 못했거나 흔치 않았고, 글씨 잘 쓰는 것도 하나의 커다란 학업 과제였으니 요즘 아이들이 마음에 안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명필 한석봉 이야기도 많이 해 주고 글씨가 인격수양의 기본이라며 아이들을 설득도 해 보지만 영 내맘같지 않습니다.

갑자기 글씨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는 명필이 정말 한석봉이나 추사 김정희 선생 밖에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조선시대 4대 명필, 자암 김구선생도 있는데 이분이 바로 우리 충청남도 예산 출신이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명필이 보관돼 있고, 이분 묘소도 예산에 있습니다.

아주 대단한 명필이셨는데 반해 우리가 거의 아무도 모르는 채로 잊고 있는 자암 김구 선생. 조정에서 내린 정려도 함께 지어져 있는 자암 김구선생 묘소에 다녀왔습니다.
 

자암 김구 선생은?

▲ 자암 김구 선생은?
 

선생 묘소 앞에 있는 추모비

▲ 선생 묘소 앞에 있는 추모비
 

부모의 죽음 앞에 시묘살이를 하다가 병이 나서 죽자 조정에서 내린 효행 정려

▲ 부모의 죽음 앞에 시묘살이를 하다가 병이 나서 죽자 조정에서 내린 효행 정려
 

정려의 편액

▲ 정려의 편액
 

선생의 묘소 일원

▲ 선생의 묘소 일원
 

선생의 묘와 신도비

▲ 선생의 묘와 신도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신도비 비몸

▲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신도비 비몸


자암 김구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십니다.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이십니다.

1507년(중종 2)에 생원 진사 양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3년(중종 8)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조좌랑을 거쳐 사간원과 성균관에서도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한 때 성균관에서 재임중 휴가를 받아 옥당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느날 밤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을 무렵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임금이 서 있고 그 옆에 별감이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는군요.

깜짝 놀라 엎드리니 중종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 여기에 왔노니 어찌 군신의 예가 필요하리요" 하며 술을 같이 마셨다 합니다.
 
이후 선생은 곧 승정원 동부승지에 오르고 좌승지로 승진 되었다가 부제학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시 중종은 조광조, 김구, 김식, 김정등 젊은 인재를 등용하여 성리학을 장려하고 문민정치를 구현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종전의 제도를 혁신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남곤 등의 모함에 걸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때 나이 31세로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곧 남해로 귀양중 화전별곡을 지었는데 문학적인 작품으로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선생이 쓴 두보 시 중 일부(국립중앙박물관 사진)

▲ 선생이 쓴 두보 시 중 일부(국립중앙박물관 사진)
 

조선의 4대명필 자암 김구선생을 아십니까? 사진

 

조선의 4대명필 자암 김구선생을 아십니까? 사진
 

조선의 4대명필 자암 김구선생을 아십니까? 사진
 

조선의 4대명필 자암 김구선생을 아십니까? 사진
 

위의 두보 시를 한자씩 풀어서 확대한 것입니다. 원문을 옮겨 보자면 <지일강산려춘풍화초향<遲日江山麗春風花草香>입니다.

▲ 위의 두보 시 원문이 있고 이를 한자씩 떼어 풀어서 확대한 것입니다. 원문을 옮겨 보자면 <지일강산려춘풍화초향<遲日江山麗春風花草香>입니다. 내용을 해석하자면  "나른한 봄날에 강산이 아름답고, 봄바람에 꽃향기 더욱 훈훈하네" 입니다.


 선생은 처음 유배후 다시 1531년(중종 26) 임피(臨陂: 현 옥구군)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33년(중종 28) 석방되어 향리로 돌아와 보니 그 동안 부모가 모두 죽어 부모의 산소에 가서 통곡하다가 기절까지 하였고 이곳에 초막을 지어 시묘살이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귀향살이로 인해 심신이 망가져 있는 상태에서 시묘까지 하면서 몸에 병이 들어 결국 이른 나이에 죽고 말았다고 하네요.

선생은 안평대군, 양사언, 한호(석봉)와 함께 조선 4대 명필로 꼽혔던 인물입니다. 예산에서 나고, 예산에 묻힌 그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지만 일찍부터 주자학 연구에 전념해 학문이 조광조, 김식과 견줘졌다고 합니다.
 
 

선생의 묘소 입구로 들어가는 국도변

▲ 선생의 묘소 입구로 들어가는 국도변


자암은 수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대부분 유실돼 자암집을 통해 전하는 것은 국문시조 5수와 경기체가인 화전별곡 뿐입니다.

글씨체가 워낙 뛰어나서 중국에서 사신으로 온 사람들마저 자암 선생의 글을 사 갔다는 분.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는 자암 김구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 정려는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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