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사는이야기

충남넷 미디어 > 사람세상 > 사는이야기

임진왜란 육지전 첫승, 금산 이치대첩과 충장사

2013.08.22(목) 14:59:18이영희(dkfmqktlek@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 금산에는 이치(梨峙)대첩비가 있습니다. 이름도 예사롭지 이치대첩비. 무엇일까요?

 임진왜란 발발후 연전연패하던 조선군이 육지전에서 첫 승리를 거둔 사건이 금산 이치대첩이었고 그 한가운데에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을 총 지휘한 도원수 권율장군이 있었습니다.

 이치대첩과 권율장군의 충정을 기리고자 세운 비가 이치대첩비입니다.

이치대첩비 외삼문이 보입니다

▲ 이치대첩비 외삼문이 보입니다
 

외삼문 정면

▲ 외삼문 정면 이치대첩문


 서기 1592년 4월 13일. 15만명의 왜군이 부산에 밀어닥쳤습니다.

 그날부터 무려 7년간이나 이 강토를 유린했던 임진왜란의 시작입니다.
 왜군은 부산에 들이닥친지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2달 뒤에는 평양성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이어 함경남도, 함경북도까지 올라가는 무서운 기세를 보였습니다.

 과거 전쟁은 지금같은 교통 통신이 발달한 것은 아니었기에 한양과 평양성까지 함락시켰다고 해서 그 아래 지역을 모두 점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로(走路)를 따라 올라간 것이기에 주로 외의 지역은 그냥 놔둔채 1직선으로 진격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이치대첩비가 있는 비각(사우)

▲ 이치대첩비가 있는 비각(사우)
 

정면에서 바라본 이치대첩비와 사우

▲ 정면에서 바라본 이치대첩비와 비각
 

비각 안의 이치대첩비

▲ 비각 안의 이치대첩비
권율장군의 승전을 기록한 이치대첩비

▲ 권율장군의 승전을 기록한 이치대첩비
 

이치대첩비 비몸 뒷면

▲ 이치대첩비 비몸 옆면


 그 때문에 북쪽은 평안도와, 남쪽에서는 1직선 주로 옆의 호남지역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은채 남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얼마 후 뒤늦게 입국한 왜병 제6군 고바야가와의 15000명, 그들이 노리는 것은 호남의 곡창지였습니다. 지금이야 금산과 논산이 우리 충청남도 땅이지만 당시에 금산과 논산은 호남쪽에 속해 있었던 곳입니다.

 당시 금산군수 권종은 15000명의 병력에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맞아 겨우 군졸 수백명을 이끌고 싸우다가 아들 준과 더불어 장렬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고바야가와 군사들이 곰티와 배티로 나눠 출병, 드디어 권율장군과 일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왜군의 한 패는 진안 쪽으로, 한 쪽은 완주 쪽으로 길을 터 전주성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는데 이에 진안 쪽으로 향하는 길목인 곰티에서는 황박, 이복남, 정담이 맞기로 하고 완주 쪽으로 향하는 배티는 권율이 맞기로 한 것입니다.

이치대첩비 비각 쪽에서 바라본 권율장군 사당

▲ 이치대첩비 비각 쪽에서 바라본 권율장군 사당 충장사
 

충장사 정면

▲ 충장사 정면 전경
 

야생화가 활짝 핀 충장사 뒤 오른쪽

▲ 야생화가 활짝 핀 충장사 뒤 오른쪽


 "오늘 우리는 진격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 죽음만 있을 뿐이다!"

 겨우 15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독려하는 권율 장군. 그가 이 배티에서 말을 타고 능선을 오가며 독전하며 싸움을 벌인 끝에 배티 골짜기는 왜적의 시체로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싸움이 어느정도 치열했는지 양측의 칼과 창이 부딪치며 내는 쇳소리가 이치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금성면 상가리 금곡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권율장군과 1500명의 군사들은 그 날 조총으로 무장한 7000~8000명의 왜군을 맞아 처절한 방어전을 펼친 끝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임진왜란 후 육지전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했던 조선군이 마침내 왜군을 상대로 통쾌한 첫승를 거둔 역사적 대첩이었던 것입니다.

이치대첩비가 세워지게 된 배경을 설명한 안내문

▲ 이치대첩비가 세워지게 된 배경과 이치대첩지를 설명한 안내문


 이치(梨峙)가 어떤 곳일까요.

 이치는 해발 350m의 고개로 산돌배나무가 있어 배티재라 불리우기도 하고, 한자로 梨(배나무 이), 峙(우뚝솟을 치)로 표기되어 왔습니다.
 금산에서 전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통로이며 양 옆에 거의 70도의 경사에 달하는 험한 산이 있는 좁은 고갯길입니다.

 이 곳에서 도원수 권율 장군은 1,500여명의 군사로 7000~8000명의 왜군 주력 부대를 궤멸시켜 호남으로의 진격을 차단시킨 것입니다.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육전 3대 대첩 중 최초의 승전으로, 임진왜란 초기 육전에서의 전세를 뒤바꾸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점에서 그 의의가 너무나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후 금산에는 권율 장군이 승리로 이끈 이치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이치대첩비를 세웠습니다.

충장사 내부

▲ 충장사 내부
 

권율 장군의 영정

▲ 권율 장군의 늠름한 영정
 

이치대첩도

▲ 이치대첩도
 

누군가 장군의 영정에 한잔의 술을...

▲ 누군가 장군의 영정에 한잔의 술을...


 고종 3년(1866)에 비와 함께 비각, 사당을 세웠으나, 1944년 일제에 의해 폭파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후 1963년 이 대첩에 참여한 사람들의 후손과 지역 유지들이 지금 장소에 다시 건립한 것입니다.

 권율 장군은 46세 때인 1592년(선조1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광주목사였는데 한양이 함락된 후 4만여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한양쪽으로 향하다가 용인에서 왜군과 싸웠습니다. 그 뒤 남원에 주둔하면서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 이치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것입니다.

 또한 1593년 2,8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여 3만여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온 고바야카와의 왜군을 맞아 2만4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시켰고,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습니다. 임진왜란 7년간 군대를 총 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역사에 길이 남을 전공을 세운것입니다.

 1599년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세상을 떠난 뒤 영의정에 올랐고 충장사에 모셔졌습니다. 이치대첩비를 보며 당시에 왜군을 격퇴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다 순절하신 수많은 이름 모를 병사들의 넋을 추모합니다.

이치대첩비 =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산83번지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