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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유일, 노비가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은 사례

예산의 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과 기념관을 답사하며...

2013.08.21(수) 12:14:41유병양(dbquddid88@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8월도 중순을 넘어 이제 말기로 가고 있습니다. 국권을 빼앗긴 뒤 일제에 저항해 나라를 되찾고자 수많은 순국 선열들이 피를 뿌린 고귀한 넋을 기리는 8.15 광복절도 어느덧 지난주의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8월은 결코 잊을수 없는 달입니다. 특히 요즘같이 과거를 모르는 왜인들의 망동과 망언이 판치는 때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남규 선생 기념관 내의 흉상

▲ 이남규 선생 기념관 내의 흉상


 며칠전 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과 기념관을 다녀 왔습니다, 이남규(1855∼1907)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시고 집안 전체가 나라에 충성한 대단한 가문이십니다.
 이남규 선생은 조선 말기의 독립 의사로서 고종 31년(1894)에 일본 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도착하자 상소를 올려 일본의 무도함을 규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뒤에 명성왕후의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격분, 통탄의 마음을 금치 못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예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의병을 돕고 함께 독립자금을 대는 등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특히 홍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우던 의병대장 민종식 선생이 일제에 쫓기던 중 이분을 집안에 숨겨주고 도피자금을 마련해 주기도 했습니다.

생가 앞

▲ 생가 앞
 

생가 정면

▲ 생가 고택 정면
 

생가 고택 안채

▲ 생가 고택 안채


 그러던 중 본가에서 일제에게 강제로 체포돼 끌려가실 때 “사가살 불가욕(士加殺 不可辱 : 선비는 죽일 수 있되 욕보일 수는 없다)"는 말로써 민족적 자존심까지 지키신 고귀한 정신을 남기신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충남 예산에는 선생의 고택과 함께 여러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기념관이 있기에 들렀는데 생각지 못한 사실을 한가지 알았습니다.‘

 수당 선생과 가문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기에 저는 이번에 보고 느낀 다른 부분을 적고 싶습니다.

 과거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하거나, 혹은 그 전 왜군이나 북방 오랑캐들로부터 외침을 당했을때 적과 맞서 싸운 사람은 많은데 대개 장군, 양반, 선비, 귀족, 관료들 위주로 기록이 남아있고 추앙을 받아 왔습니다.

 그도 그럴만 한 것이 노비나 일반 평민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채 죽어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당 선생 기념관

▲ 수당 선생 기념관
 

기념관 현판

▲ 기념관 현판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시는 기념관 안내 선생님

▲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시는 기념관 안내 선생님


 그런데...
 수당 이남규선생 기념관에는 약간 놀라운 기록과 기념물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즉 독립운동과 관련해 국가 유공자로 당시 이남규 선생의 집에서 일하던 노비 1명이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아 국가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상 노비가 훈장을 받은 사례나 기록은 아마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보면 이렇습니다.

이남규 선생이 아들 이충구 선생, 노비 김응길 선생과 함께 피살되는 상황

▲ 이남규 선생이 아들 이충구, 노비 김응길과 함께 피살되는 상황
 

당시 상황의 재현

▲ 일제가 진정 칼로도 베지 못한 선생의 민족혼


 선생이 일제 헌병들에게 의해 끌려 가던 날, 선생의 큰 아들 이충구 선생과 노비였던 김응길, 가수복 두 사람이 함께 따라 나서게 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사지에 홀로 가시게 할수 없어서 그랬고, 노비 두명 역시 모시던 주인이 일제에 끌려가자 어떻게든 보호해 보겠다고 함께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이들에게 아주 큰 운명적인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제에 끌려가던 중 일행이 아산에 이르렀을 때 일제는 총칼을 휘둘렀고 4명중 수당 선생과 아들 이충구, 그리고 노비 2명중 김응길 선생이 그 자리서 피살 당한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나머지 한명의 노비였던 가수복 선생은 그날 목숨은 건졌다고 합니다.

김응로 선생의 훈장과 훈장증

▲ 김응길 선생의 훈장과 훈장증


 이후 국권을 회복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수당 선생과 아들 이충구, 그리고 노비였던 김응길 선생에게도 독립훈장을 추서하게 된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후 수많은 독립 애국지사가 나서서 목숨을 걸고 일제에 맞서 싸웠지만 노비나 평민, 농민들은 거의 기록이 없어서 그 충혼을 안정받지 못한채 죽어간 분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남규선생 기념관에는 노비였지만 애국지사인 선생을 지키기 위해 사지로 같이 뛰어든 정신을 기리고자 훈장을 추서하고 그가 받은 훈장을 고스란히 간직해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갔던 가수복 선생은 목숨을 잃지 않으셨기에 훈장 추서는 안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살당한 김응길 선생은 당시 신분이 노비였기에 결혼을 한 상태가 아니었고, 따라서 유가족이 없어서 그가 받은 훈장은 이남규 선생 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남규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 그 높은 뜻을 펼치셨던 정신을 본받고자 당신의 생가와 기념관을 둘러보러 갔다가 이렇게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 더 가슴 뭉클한 것을 느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신분의 고하, 직위와 직책, 자신의 처지 모두를 다 떠나 오로지 대한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신 수많은 애국지사들. 그중에 아무런 기록과 이름조차 하나도 남김 없이 그저 들풀처럼 사라져 간 민초들.
 저는 오늘 그분들을 위해 다시금 묵념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렇게 지켜주신 내 나라 내 땅, 잘 가꾸고 이끌어 가겠습니다”

  * 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과 기념관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33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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