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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가 많은 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2012.03.07(수) 잎싹(kji206@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공주국립박물과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국보가 많은 박물관으로 무령왕릉과 충남 북부지역에서 출토된 국보 19점과 보물 3점을 포함한 문화재 16,000여점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1층 무령왕릉실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총 108종 4,6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입구에 무령왕릉을 발굴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전시실 내에는 무령왕릉 내부와 목관을 복원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무령왕과 왕비가 사용했던 화려한 금, 은제 장식품을 비롯하여 왕릉을 지키던 석수, 무려왕의 이름을 적은 지석과 각종 금속제품, 중국도자기, 옥, 유리구슬 등을 전시하고 있다.

 


어떤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지 하나씩 살펴볼까?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가장 먼저 무령왕릉 연도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짐승 모양의 돌상은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국보 162호) 진묘수로 그 의미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죽은 자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데 진묘수는 무덤을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풍습은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처음기능은 무덤을 지키는 것이었지만 점차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영혼의 승선을 도와준 안내자의 역할을 겸하였으며 백제왕실이 중국의 도교적 저승세계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던 점을 알 수 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묘지석
묘지석으로 신지의 땅으로 내려오셨다는 내용과 영동대장군은 천하왕이다 라고 적혀 있어 무령왕릉 임을 확실하게 증명해준 중요한 유물이다. 또한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께서 나이가 62세되는 계묘년 (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으며 을사년 (525년) 8월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 모셨다는 기록되어 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무령왕이 누워있던 나무관은 왕비관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크기는 262cm로 다섯장의 나무 관으로 뚜껑을 만들었으며 300년 정도된 금송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실제 관이 전시중이었는데 긴 세월동안 섞지 않은 것은 관을 만들때 바닷물에 담갔다가 그늘에 여러차레 말리기를 되풀이하여 백제인들은 나무에 옻칠을 여러번 하여 땅속에 넣어도 섞지 않았다고 한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왕과 왕비의 관 꾸미개는 백제의 번영을 기원하듯 불꽃모양에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으로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이며 화려한 인동덩굴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인동초는 생명력이 강하여 백제의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하고 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왕과 왕비의 신발
왕의 신발은 세장의 금동판을 붙여서 길이는 35cm로 바닥에 못이 박혀있는게 특이하였다. 신발이 무척 큰 것은 저승길이 멀고 험한 길이기에 상징적의미를 담고 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왕과 왕비의 베개와 발받침
아주 화려한 왕의 베개와 발받침은 처음 보는 것으로 금박으로 거북등 무늬를 이어 붙이고 금꽃으로 장식하였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왕비의 허리부근에서 발견된 유리동자상은 두점 모두 머리를 깎고 두 손을 합장한 모습인데 좌측 동자상은 하반신이 파손되어 있었다. 왕비가 살아 있을때 부적과 같이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장신구에 매달아 왕비 자신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잔이 그을린 흔적으로 보아 잔을 올려놓고 불을 켰을것 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유독 우측 하나는 불을 피운 흔적이 없었다. 이유는 백제인들의 만일을 위한 준비성과 여백의 미를 엿볼 수있는 부분이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몸체에 긴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붙인 형태의 청동다리미는 실제 왕비가 사용은 안했지만 무덤에 여성 용품을 넣어두어 백제인들의 의생활을 엿볼 수 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동탁은잔은 왕비의 머리 부근에 놓여 있던 것으로 잔과 뚜껑은 은으로 만들었고 잔받침은 동으로 제작되었다. 새겨진 문양은 부여의 금동대향로의 문양과 닮았는데 뚜껑의 꽃 봉오리 모양 손잡이 아래를 금꽃잎으로 장식하고 뚜껑과 잔, 받침의 겉면에는 산과 골짜기, 짐승, 나무, 여덟잎의 연꽃 모양, 구름, 용을 새겨 극락정토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2층에는 충청남도의 고대 문화실로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 시대를 거쳐 마한, 백제의 웅진과 사비 유물을 살펴 볼 수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두루마리로 된 양직공도는 520~530년 경에 중국 양나라의 소역이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데 당시 양나라 황제에게 사신으로 온 외국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그 사신을 보낸 나라에 대해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면서 당시 백제사신의 모습이 다른 나라 사신들 모습에 비해 세련된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양직공도을 통해서 백제가 요서지방까지 차지했고 지방에 22개의 담로가 있었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웅진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백제 도제불상대좌는 백제말기인 7세기 경으로 추정하는데 백제시대 가마터에서 파편 상태로 수습되어 복원 결과 높이가 100cm, 폭 280cm 로 초대형 불상받침이다. 불상대좌만 보아도 얼마나 큰 부처님이 계셨는지 상상으로 짐작 할 수있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공주지역의 통일 신라 시대 유물인 계유명천불비상(국보 제108호)는 돌을 다듬어 지붕모양을 한 덮개돌과 연꽃무늬 받침, 몸체를 각각 따로 만든 비석모양으로 앞면에 글자가 새겨진 작은 불상들이 수없이 새겨져 백제의 왕과 대신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당시 냇가 옆에서 빨래판으로 쓰고 있었다고 한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서혈사지 석불좌상(보물 제979호)은 공주 서혈사터에서 발견된 부처상으로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여 다리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려져 있다.

 

 

  국보가 많은 박물관 사진  
 
박물관 야외전시장에도 백제문화유산이 가득하다.
그중에서 공주 대통사 석조 (보물 제148호, 제149호)는 돌을 파서 물을 담아 쓰도록 만든 큰 물통으로 절에서 물을 담아두거나 큰 행사가 끝난 후 그릇을 씻을때나 연꽃을 기르기 위해 사용하였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군들은 이중 하나의 석조를 말먹이통으로 사용하였다하니 시대의 아픔은 기억저편으로 사라지고 이렇게 보존으로 이어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박물관에서는 입구에서 안내단말기 대여가 되므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설명을 들으며  박물관관람을 한다면  그냥 지나칠때는 물건에 지나지않았던 유물도  그 의미를 알고 살펴보게 되어 문화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것 같다.
 

국립공주박물관 (041-850-6300)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웅진공 360번지)
http://gongju.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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