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지역신문뉴스

교촌리 큰댁과 학교, 앞술막 사람들 이야기

명재고택은 명재 古宅 아닌, 명재와 연고 있는 故宅

2024.03.25(월) 16:03:22 | 놀뫼신문 (이메일주소:nm4800@daum.net
               	nm4800@daum.net)

노성산 옥녀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교촌리 전경

▲ 노성산 옥녀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교촌리 전경


논산문화원에서는 2001년 <명재윤증>을 펴냈다. 2013년에는 <지조를 지킨 명재 윤증>을 펴내더니 다음해에는 160여 쪽에 달하는 만화 한 권을 선보였다. 만화 명재 윤증 선생은 충남문화원연합회 홈페이지에 전자책으로도 올려져 있다(충남문화원연합회 http://ebook.cnkccf.or.kr:8800/home/list.php).

논산 여러 행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한옥체험업협회 국악단 이름은  ‘큰댁어울국악단’이다. ‘큰댁’에서 어울려 즐긴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큰댁은 과연 어디일까? 

본지 2023-10-11일자 [다같이돌자 동네한바퀴]는 노성산 자락의 이야기들이었다. <노성산 옥녀봉과 교촌리 궐리사 이야기>들이 비교적 오래 된 버전이라면, 그 이후에 이어진 교촌리, 교촌사람들의 생활사 버전이 궁금해진다. 
스나마나 노성장, 번개번쩍 상월장

노성장은 전통5일장이 열리는 4·9장이었다. 장은 8·15 이전은 물론 70년대 중반까지 섰다. 읍내리 남쪽 약방 일대에 섰는데 생필품으로 입성(옷)과 먹거리로 싸전, 젓갈, 대장간... 있을 것은 다 있었다. 하지만 마방도 있던 공주 경천장에는 짭치는 형세였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스나마나 노성장, 번개번쩍 상월장”이다. 상월장은 현재 상월 면사무소 앞 길 건너에 섰다. 

노성의 명물은 노성참게였다. 노성천은 노성산자락 옥녀봉 계곡물도 받아들이지만 그 위로는 계룡산 쪽의 물부터 받는다. 나중에 섶다리에서 발전한 석조교는, 노성천 군데군데 있었다. 상월 지경리 석조교 밑에서 참게새끼가 크면 물을 따라 앞술막 앞의 노성천으로 이동한다. 돌다리참게로 불리던 노성참게는 금강 하구언이 설치된 이후 씨가 말라버렸다. 근래 권가네 식당 옆에와 화곡리 앞논에 양식장을 마련, 노성참게의 부활을 꾀하나, 여의치는 않은 모양이다.

임금수라상에 진상했던 노성참게

▲ 임금수라상에 진상했던 노성참게


백중날 노성장터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졌다. 그날 지주들은 머슴들에게 술과 개국(보신탕)을 내놓고 용돈도 챙겨주었다. 여름옷도 한 벌 챙겨 주었고 가을 추수 때는 겨울 옷도 챙겨주었다.

노성 칠형제 두레메기

서민 삶의 중심지는 아무래도 부자집인 교동집(조동집) 명재고택이었다. 백중날 교동집 행사 때 7풍장이 모여 들었다. 노성면 교촌리 향교골, 읍내리 고랭이, 둥둥골, 옥거리(감옥터), 상월면 주곡리 숯골, 한천리 들말, 안골 이렇게 7개 마을이 모여서 행사를 벌였다.  
백중날은 일곱 동네가 풍장을 갖추면서 도지도 짊어지고 왔다. 형님깃발, 아우깃발 순서는 도지 내는 양에 따라서 결정된다. 교촌리가 큰집이니 교촌리에 와서는 절을 한다. 농자천하지대본 긴 깃대를 숙이고 자리를 비켜준다. 

대나무 깃대는 두텁고 높았다. 서넛이 줄로 지탱해주면 가운데서 힘센 장정이 그 대를 조정하였다. 마지막 ‘농자천하지대본’ 기인 통큰 대나무는 전라도에서 구해왔다. “키 작은 김선호 씨가 김제에서 구해가지고 둘이 메고서 걸어왔대요.” 이 귀한 깃대는, 비를 피해 담 밑에 보관하여 왔으나 현재는 없어진 상태다.

7마을 연합두레는 ‘제자마을이 스승마을에 와서 문안드리고 한판 노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가? 옛날에 노성 교촌과 상월 주곡리 숯골이 선생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고 한다. 교촌은 궐리사와 노성향교가 있고 숯골은 문무를 겸전한 이삼 장군의 고택과 재실이 있는 마을이다. 두 마을 두레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1982년 노성두레풍장전승보존회가 결성되었다. 2005년 제46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노성 칠형제 두레메기」를 재연하여 아리랑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노성두레풍장전승보존회는 현재 이건창 회장이 이끌고 있으며, 상월 두레와의 연합도 숙제라고 한다. 

명재고택의 애환

명재고택에는 “대한민국 명품고택(名品古宅)” 인증이 붙어 있다. 윤완식 종손은 “당신이 지은 집이 아니고 후손이 지은 집이고 그래서 연고가 있으니 명재고택(故宅)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병자호란 시절, 인조의 남한산성 굴욕이 있기 전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신하면 안전하리라는 계산은 빗나갔다. 태자를 강화도로 피신시킨 윤선거는 청이 강화도까지 건너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제나 여자들이다. 당시 윤선거의 부인 공주 이씨는 자결을 선택하였다. 훗날 이를 갸륵히 여긴 인조는 공주 이씨 정려문을 세워주었다. 당초에는 명재

고택 남동쪽 초연당 앞에 있었는데, 현재는 고택 남쪽 큰 길가에 이축되어 서있다.

윤증은 당시 서인의 실세이자 본인의 스승인 송시열과 사제의 연을 끊었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단초를 제공했고, 결정적으로는 회니시비 후 같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게 된다. 노론의 공세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던 백의정승 윤증의 사후에도 이어졌다. 살아생전 윤증은 자손들에게 “벼슬길을 나서지 마라”고 이른다. 

윤증의 묘는 지금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에 있다. 그는 유언으로 내 관 위에 “아무 글자도 쓰지 말라”고 했다 한다. 나중에 그의 무덤이 파헤쳐졌다. 부관참시를 하고자 해서다. 막상 관을 보니 관직명이 쓰여 있지 않음을 보자 더 이상 위해하지 않고 흙을 덮었다고 한다. 정적에 대한 가해 행위가 사후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모양이다. 

명재고택 같은 양반가에는 식객들이 행랑채에 몰려들었다. 문장을 짓거나 풍류를 즐기며 오래 머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던 모양이다. 명재고택 안채는 종손이 살고 있는 살림채로 현재 보수중이다. 집 벽에는 불에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다. 1894년 동학난 때 동학도 중 하나가 불을 질렀다. 옆에 있던 사람이 급히 불을 껐단다, “이 집 양반은 다른 양반들하고 달라!” 하면서.  당시 파평 윤씨는 유학자 집안이었지만, 양반과 상민이 평등하다는 인내천 사상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관대하였던 모양이다.

초상날 의리 지키던 거렁뱅이들

명재고택만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게 아니다. 미담은 다른 부자집에도 있었다. 당시 논산 데보뚝 밑으로는 거지촌이 있었다. 거렁뱅이들이 한끼 밥을 위해 밥 바가지 들고 이 동네를 찾아온다. 이들의 힘은 초상났을 때 발휘된다. 동네에 누가 죽으면 거지대장이 거렁뱅이들을 몰고 와서 일을 시작한다. 마당도 청소하고 산소일도 거든다. 부자집은 5일장 7일장도 했는데, 3우제 때까지 남아서 일도 하고 밥도 먹었다. 

동네 상여집은 천화동에 있었지만 없어진 지 오래다. 그 속의 상여뿐 아니라 전국 상여는 다 털린 모양이다. 상여의 조각은 화려한 모양의 그림들이 빙 둘렀고 봉황대 용대가리 꽃가마였다. 전체적으로 빨개서 무섭게 보이던 그 상여가 사라진 것이다. 

상여계를 ‘연반계’라고 했다. 왜정시대 때 붓글씨로 쓴 두툼한 회칙과 운영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 따라 장례문화가 바뀌면서 그 책을 책임지고 보관할 사람이 없었다. 결국 요량잡이(딸랑재비)를 하던 후손의 손에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상여는 메는 거보다 보관이 더 힘들었다. 이래저래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보니 상여와 장례 풍습은 이제 세월 따라 사라진 전설이 되고 말았다.



명재고택 바로 옆에 자리잡은 노성향교

▲ 명재고택 바로 옆에 자리잡은 노성향교



앞마당(중앙은 양현재(=유생 기숙사)

▲ 앞마당(중앙은 양현재(=유생 기숙사)


서울대 많이 보낸 노성중학교 전신

노성중학교 울타리 근처에는 도살장이 있었다. 소와 돼지를 잡았는데, 명절 때는 200마리를 잡았다는 허풍이 나돌 정도였다. 실상은 장날에 소 1~2마리, 돼지는 십여 마리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소나 돼지 잡는 날, 동네 사람들은 양철통을 갖고 간다. 도축 부산물(부속품)과 피를 얻어다가 끓여 먹었다. ‘피창국’이다. 이 도살장은 1977년경 자연스레 사라졌다. 아이들 교육상으로도 좋지 않고 논산에 큰 도축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중반, 향교 명륜당에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남녀 공학 1학급 중학교 과정이 개설되었기 때문이다. 향교에서 영어도 공부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사립이던 명륜고등공민학교를 거쳐서 1964년 3학급 설립인가를 받아 공립인 노성중학교로 틀을 갖춘다. 시골에 있는 공민학교라고 얕잡아 보다가는 큰 코 다친다. 논산 읍내에서도 들어기가 어려웠던 서울대학교를 이 학교에서는 여럿 보냈기 때문이다. 박길호의 큰형 박승호, 이만재... 성광원 제25대 법제처장관도 이 학교 출신이다. 

당시 조회 때 구령을 부치던 학생은 학생회장 아닌, 대대장이라고 불렀다. 병사리 의창이 있는 곳이 원병사인데, 이곳에서 이장도 오래 한 김영현 옹이 노성고등공민학교의 산 증인이다. 노성중학교의 학구는 노성과 상월면이다. 58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 학교는 한때 학년당 6~7개반 총학생수 1300여 명에 이르렀는데, 현재는 80명 선이다.

노성초 전신 명신학교가 개교한 곳도 교촌리 

향교가 있는 교촌리 일대는 교육도시(?)다. 향교는 현재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있다가 명재고택 옆으로 이건하였다. 저수지와 그 옆에 있는 노성초등학교 자리는 원래 윤대감 터였다. 윤대감의 호가 소곡이었고, 소곡마을 한복판의 저수지 이름도 소곡저수지다. 이 동네에서 딸기체험 카페를 운영하는 베릴리 대표는 ‘소곡상회’라는 브랜드로 농산물을 판매한다. 
노성초는 ‘초등학교’ 이전 일제강점기 때는 노성 심상소학교였다. 105년의 역사를 가진 이 학교에는 현재 56명이 재학중이다. 노성초등학교는 1917년 5월 28일 노성공립보통학교로 승격된 이후 심상소학교 → 노성공립국민학교를 거친 학교다. 그러나 그 전신인 사립 명신학교가 개교한 때는 1908년이며, 개교한 곳도 교촌리였다. 



교촌리큰댁과학교앞술막사람들이야기 1


허벅지살 베어내 효도한 송태관 집터(비닐하우스) 옆에서 교촌리 옛 이야기 건져올리는 동네주민들(오종근→오순근→김종헌→윤찬중).

▲ 허벅지살 베어내 효도한 송태관 집터(비닐하우스) 옆에서 교촌리 옛 이야기 건져올리는 동네주민들(오종근→오순근→김종헌→윤찬중).


충청관찰사의 단골현인 노성현과 비석들

노성현에는 교육기관만 있었던 게 아니다. 감옥에 해당하는 옥사가 있었고 그 자리는 지금도 옥거리라고 부른다. 면사무소 자리는 객사터였다. 이상철 씨 집은 사창(창고)이 있던 곳이다. 현감이 거처하는 감영에는 6방이 있었다. 6방의 아전은 주로 경주 이씨가 맡았다. 

노성현은 공주 감영의 충청 관찰사가 선호하는 곳이었다. 가깝기도 하거니와, 공물을 제일 많이 바치는 곡창지대였기 때문이다. 노성 7형제 일곱 마을은 모두 노성천 하류 주변에 위치한 마을들로서 속칭 ‘물 아래 일곱 동네’라고도 불렸다. 이 일대는 개잣들로 불리는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곡창지대를 형성하였다. 

공주 산성공원 입구에 비석이 도열해 있다. 관찰사들이 부임할 때마다 세웠을 것이니 많을 수밖에. 그 정도는 아니지만 노성현도 못지않다. 지금 노성면사무소 앞쪽에는 비석이 즐비하다. 원래 앞술막 삼남길에 과객들 잘 보이라고 세워두었던 것들이다. 

이것들을 1차로 중학교 뒤로 옮겼다가, 2차로 면사무소 쪽으로 옮겼다(1974년). 한정된 땅에다가 많은 비들을 한꺼번에 세우려니 작업자들은 꾀가 난 모양이다. 당상관 이상의 비에는 갓이 씌워져 있었다. 이 비석머리까지 그대로 세우자면 가분수라서 면적을 많이 차지한다. 그래서 이 갓비들은 면사무소 앞 땅 속에 묻혀 있고 비석거리에는 본체만 서 있다. 

이래저래 노성의 역사와 이야기는 묻혀간다. 갓비만 그런 게 아니다. 미처 옮겨가지 못한 비석 본체도 있다. 앞술막 논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쟁기질을 하다보면 큰돌 비석이 걸렸단다. 포크레인이 없던 시절이니까 장정인 성
석인 씨 주축으로 하여 지렛대로 들마시를 하여 캐냈다는 것이다. 어떤 때 대여섯 개 나오면 비석 있는 곳에 모아놓기도 했지만, 논의 ‘물고’로도 썼다고 한다. 

앞술막 장승골과 엄격한 주모

초포마을에서 노성천을 따라오다 23번 국도 밑 굴다리를 통과하면 좌로는 권가네 식당이요, 우로 직진하면 10여 호의 동네가 나온다. 노성중학교 동쪽이 앞술막이다.

초입에 천하대장군 장승 둘이 서서 한양 먼길 가느라 지친 과객들을 맞는다. 그 자리가 앞술막 장승골이다. 이 장승골에는 관찰사 현감 등등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들도 꼿꼿하게 서서 자기 세를 과시했다.

전라도 남원을 출발한 이도령은 황화정을 통해 충청도 땅을 밟는다. 은진현 통과한 다음 초포마을(항월리) 거쳐서 노성현 점 찍고 공주와의 경계인 지경리(地境里)를 지나. 경천마방 거쳐 공주→ 서울로 가는 길이 삼남길, 이몽룡 과거길이다.

삼남대로를 노성에서만 보면, 교촌리 앞술막 쪽이다. 그 길 앞에서 술을 파는 주막이 있어서 앞술막이다. 그 주막은 사극에 나오는 마당 탁 트인 주막이 아니다. 먹튀를 생각할 수 없도록 들고나는 문이 딱 하나뿐인 구조로, 그 초입은 주모방 겸 카운터다.

앞술막 주막거리 앞으로 노성천이 흐른다. 경천으로 가는 이도령과거길, 삼남길이다.

▲ 앞술막 주막거리 앞으로 노성천이 흐른다. 경천으로 가는 이도령과거길, 삼남길이다.

교촌리큰댁과학교앞술막사람들이야기 2


앞술막에 자리잡은 오종근 한국화가 전시장(주변에는 산도山稻 등 토종 천국이다)

▲ 앞술막에 자리잡은 오종근 한국화가 전시장(주변에는 산도山稻 등 토종 천국이다)


교촌리를 빛낸 사람들

주막이 있던 그 자리에서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노성현 동헌이요, 그냥 지나치면 공주 경천이다. 현재 앞술막에는 오종근 한국화가 전시장이 있다. 오화백은 한국화를 1976년 독학으로 시작하였다. 그 동안 150여회 전시회를 가진 그는 이제 자기 고향인 노성 교촌리에 개인 화실 겸 전시실을 갖춘 것이다. 초창기 시절, 그가 미술공모전에서 당선되었을 때  “남의 것을 빌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이었다”라는 심사평이 유별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리는 데 소질이 있었고, 공직생활을 하면서 짬짬 갈고 닦은 결과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개척해낸 것이다. 

현재는 각종 미술대전(대한민국·남농·소치)의 초대작가가 된 오 화백의 집 딸린 밭에는 고구마와 함께 벼가 심겨져 있다. 산도(山稻), 예전 밭에다가 심고 가꾸던 산도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교촌리에서 입신양명한 사람이 몇 된다. 그 중 하나가 아랫말 출신 윤덕병 씨.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예편한 그는 한전 사장을 지낸다. 언젠가 띵동띵동하던 전차를 고물로 팔아넘겨서 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 된 적이 있었다. 

그때 박정희는 그에게 정치 입문을 권했다. 그러나 공화당 공천이 양순직에게 돌아가는 바람에 국회의원 꿈은 무산되었다. 공화당이면서도 3선 개헌을 반대하던 양순직은 신민당 김한수에게 패한다. 동네사람들은 그 패인 중의 하나로 당시 윤덕병 씨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꼽는다.

고려대 상대를 나와서 현대 자동차 서비스 부사장을 지낸 윤명중 씨도 성공한 출향인이다. 서울대 출신인 박승호 씨의 동생 박길호 씨는 경제기획원 국장을 역임하였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경우도 있지만, 교촌리의 자랑은 의외의 곳에 있다. 궐리사 공자상이 내려다 보는 곳, 아래쪽에 기념비석이 하나 서 있다. 공동(共同)이라는 큰 글자 아래로 충효절사 절부절사가 병기되어 있다. 후손이 없어 돌보는 이 없는 고독한 혼을 잊지 않고 기념한다는, 무명 충효자들을 위한 비석이다. 마을에서는 이곳에서 무연고 제사를 드려준다.

무명 충효자들을 위한 비석. 마을에서 무연고 제사를 드려주는 곳.

▲ 무명 충효자들을 위한 비석. 마을에서 무연고 제사를 드려주는 곳.


 

놀뫼신문님의 다른 기사 보기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놀뫼신문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