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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귀밑 머리 쓰다듬어 삼 년 전 떠난 그대 돌아오마 삼 년 전 떠난 그대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조선의 여류 시인 임벽당 김씨 정원

2023.11.20(월) 20:56:38 | 충화댁 (이메일주소:och0290@hanmail.net
               	och0290@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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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녀음 
                 임벽당 김씨 
땅이 후미져 오가는 사람 적고
산이 깊어 속세의 일 드물다네
가난한 집안에 넉넉한 수 없어 
자고 갈 손님도 이 밤에 돌아 가
 

깊은 산골 마을에 사는 집안에 손님이 왔으나 가난해서 술이 없어 돌려 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임벽당 김씨가 한시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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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벽당 김(1492~1549)씨는 부여 중정리 출신으로 별좌 김수천의 장녀로 태어나 사간원 사간을 지낸 조부 김축으로부터 글씨를 익혔다. 1509년 18세에 유여주한테 시집을 와서 아들 위를 두었다. 남편 유여주는 중종 때 기묘사화 후 고향인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도화동으로 낙향하여 임벽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의 이름을 따로 짓지 않아서 임벽당이라는 별호에 성씨를 붙여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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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벽당 부부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이 500여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임벽당 정원 한가운데 우뚝 서있다.
남당리 마을 안에는 임벽당 묘소, 생가터가 남아있다. 임벽은 자연을 벗 삼아 욕심없이 살겠다는 뜻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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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유씨 족보에는 유여주의 부인 임벽당 김씨를 문장을 잘 했고 글씨를 잘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집으로 ≪임벽당집≫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그의 시는 ≪열조시집 列朝詩集≫, ≪난설헌집 蘭雪軒集≫, ≪대동시선 大東詩選≫ 등에 7수만 전한다. <증별 贈別>에서는 이별의 슬픔을 나타낸 일반적인 한시의 주제를 다루었으면서도 여성 특유의 정한(情恨)과 내면 세계를 비유적으로 잘 묘사했다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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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밑머리 쓰다듬어 돌아오마 삼년 전 떠난 그대.
갓옷 입고 겨우 겨우 추위를 막는 외로움
저린 갈바람 귀밑머리 아프게 스쳐가고 
먼지 쌓인 찬 거울엔 야윈 얼굴 언뜻 비치네.

보고픈 꿈 풍진 속에 희미해지고 
이별의 시름 하늘 끝에 막혀있네.
서성이며 이리저리 생각하노라니 
흐르는 눈물 방안에 가득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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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벽당이 지은 시를 베갯모에 자필로 써서 수를 놓았다고 전해지는 시를 새겨놓은 시비 

임벽당은 부여에서 태어났지만 18세에 기계 유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면서 서천군 비인면에서 일생을 마쳤다. 7편만 남은 시는 주로 이별과 가난의 정한을 노래하고 있으며 그녀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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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벽당의 시는 7 수만이 전한다. 이 7 수의 시를 한편 씩 새긴 시비를 전시해 놓았다.
임벽당의 시는 7 세 손 유세기가 조선 후기 유명한 문사들인 조지겸, 윤증, 조인수, 한태동, 남용익, 남구만 등의 서문과 발문을 받아 <임벽당칠수고>라는 시집으로 엮었다. 
유세기의 친구 김두명이 1683년(숙종 9년) 중국에 사신을 다녀오면서 명나라 전겸익이 엮은 <열조시집>구해와서 유세기에 보여주었다. 그 책 속에서 김임벽당의 시 세 수가 수록된 것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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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벽당칠수고>에 실린 임벽당의 시 일곱수 가운데 <제임벽당> 2 수는 임벽당이 베갯모에 자신의 필체로 직접 수를 놓았다. 그 시를 수놓은 베갯모는 7세 후손까지 내려오는 동안 상자 속에 잘 보관되어 있었지만 거듭된 전쟁과 화재로 유씨 집안의 유물들이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에 비해 임벽당이 세간에 덜 알려져 있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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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존재 가치는 커녕 문재가 있어도 드러낼 수조차  없었던 조선시대에 중국 시집에 실린 시로 알려진 여류 시인을 기리는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임벽당 정원에 다녀왔다. 임벽당 부부가 심었다는 수령 5 백여년의 거목 은행나무만의 임벽당 시인의 시가 있는 정원을 지키고 있다.  


임벽당정원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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