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임천보부상 저산팔읍상무우사 공문제
코로나의 시간 속에 갇혀 있었던 지역의 축제와 문화 행사의 문이 겨우 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행동에 겨우 활기를 찾아가고 눈빛에는 생기가 어리기 시작했는데 이태원에서 일어난 사고로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지난 11월 5일 부여 임천면 가림성 임천관아 형방청 앞 광장에서 열린 임천 보부상 공문제에 다녀왔다.
부여 임천면에서도 예정되었던 임천 보부상 공문제를 대폭 축소한 형태로 진행했다.
등짐과 봇짐을 이고 지고 근방의 장날을 찾아다니며 장사를 했던 보부상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상단을 구성하게 된다. 모시가 많이 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저산팔읍상무사'라는 보부상단이 조직되고 부여 임천면에는 '저산팔읍상무우사'라는 보부상 상단이 활성화되었다.
부여 임천면에서 활동하던 보부상 조직은 주로 부피는 작고 값어치가 나가는 귀금속, 공예품, 사치품, 지물 등을 취급하였다. 주로 상품을 봇짐에 싸서 짊어지고 다니며 행상을 하는 조직이었다. 상도를 지키고 규율을 엄격하게 하며 민주적인 운영을 시도했다.
보부상들은 1년 한 번씩 보부상단의 규칙과 명단을 적은 공적인 문서와 유품을 놓고 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경건하게 공문제를 지내고 상단을 이끌어갈 신차영감(영위)를 새로 선출하기도 했다. 그런 의식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과 한국전쟁을 지내는 동안 축소되고 사라져 갔다.
임천보부상 상무우사 마지막 영위였던 황인철 생가는 임천면 탑산로에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며 보관하고 있던 106점의 유물을 정림사지박물관에 기탁해 보부상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 임천보부상공문제 의식이 끝난 후에 이어진 보부상 난전놀이의 한 장면.
보부상들이 장터를 다니며 손님을 끌어 모으기 위해 '싸구려 타령'을 부르고 함께 흥을 돋구고 즐겼던 일을 상상력을 동원해 공연으로 꾸몄다. 익살스러운 사설과 재담, 타령으로 신나지 않는 세상을 신나게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