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문화·역사

백마강을 바라다보는 백제의 국찰 왕흥사지

국보로 지정된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

2022.09.28(수) 06:21:42 | 대로 (이메일주소:dried@naver.com
               	dried@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문화유산의 도시 충청남도 부여군은 백제 사비 시대의 왕도였습니다. 부여에는 유난히 큰 사찰이 많습니다. 시내에 정림사지가 있고, 부여왕릉원 인근에 능산리사지가 있으며, 백마강 가에 왕흥사지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백제 왕실에서 세우고 관리한 국찰들입니다.

왕흥사지의 위치 / 출처 - 왕흥사지 안내판
▲ 왕흥사지의 위치 / 출처 - 왕흥사지 안내판

오늘은 제68회 백제문화재가 열리는 백마강 구드래 일원이 강 건너 바라다보이는 왕흥사지를 찾아보았습니다.
왕흥사지는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과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곳,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왕흥사지 전체 모습 / 출처 - 왕흥사지 안내판
▲ 왕흥사지 전체 모습 / 출처 - 왕흥사지 안내판

왕흥사지는 백제의 국찰 왕흥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폐사되어 절터만 남아 있지요. 부여 부소산성과 낙화암, 고란사, 그리고 부여 구드래 일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왕안리 마을 울성산성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경관이 빼어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흥사는 600년(무왕 1)부터 634년(무왕 35)에 걸쳐 지은 백제의 대사찰이며, 당시 법왕은 30여 명을 출가시켰다고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나 2007년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고 새겨 있어, 실제 창건연도가 577년(위덕 24)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백제 멸망 뒤 이 절에 남아 있던 백제 병사 700여 명이 신라의 태종 무열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폐허가 되었습니다.  [자료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

삼국사기는 “그 절이 물가에 있고, 단청이나 장식이 크고 화려하며, 왕이 항상 배를 타고 절에 가서 향불을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흥사지에 이르는 길
▲ 왕흥사지에 이르는 길
 
왕흥사지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이지만 잘 닦여 있고, 길가에 백일홍이 만발하고 있어서 천천히 구경하면서 들어갔습니다.

왕흥사지에서 건너다 보는 구드래 일원
▲ 왕흥사지에서 건너다 보는 구드래 일원

백마강 건너편에 구드래 나루터가 보이고 관광객을 실은 황포돛배가 연신 강을 오르내립니다.
구드래 일원에는 오는 10월 1일부터 10일까지 열리는 제68회 백제문화제 준비가 한창입니다. 10월 1일에는 이곳에서 화려한 개막식이 펼쳐질 것입니다.

왕흥사지에서 바라본 부소산
▲ 왕흥사지에서 바라본 부소산
 
강 건너에 부소산이 보이고 산 중턱에 낙화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기슭에는 고란사도 보입니다. 부소산 아래 백마강 가에는 한옥 건물의 나루터가 있고 구드래나루터에서 출발한 황포돛배가 이곳에서 선회합니다.

왕흥사지 주차장
▲ 왕흥사지 주차장
 
고운 자갈이 깔린 주차장과 왕흥사지 사이에는 철제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고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왕흥사지 명문 기와1 / 출처 - 왕흥사지 안내판
▲ 왕흥사지 명문 기와1 / 출처 - 왕흥사지 안내판

왕흥사지 기와2 / 출처 - 왕흥사지 안내판
▲ 왕흥사지 기와2 / 출처 - 왕흥사지 안내판
 
왕흥사지는 사적 제427호로 지정된 사찰로 백제 위덕왕이 577년에 세운 사찰 터입니다. 1934년에 왕흥(王興)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왕흥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흥사 가람배치도 / 출처 - 왕흥사지 안내판
▲ 왕흥사 가람배치도 / 출처 - 왕흥사지 안내판

안내판에는 발굴조사 당시의 유적 전경과 절 배치도, 목탑지, 전경 등이 사진으로 담겨 있어서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서 왕흥사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왕흥사지 출토 유물 / 출처 - 왕흥사지 안내판
▲ 왕흥사지 출토 유물 / 출처 - 왕흥사지 안내판
 
왕흥사지에는 갖가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목탑지 출토 사리기와 치미(건물의 용마루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가 발견되었으며, 사찰 건물 외에 백제시대 가마터가 발견되어 사찰에서 직접 기와를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치미는 국내에 알려진 고대 치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국보  제327호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 / 출처 - 문화재청 문화유산포털
▲ 국보 제327호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 / 출처 - 문화재청 문화유산포털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는 국보 제327호로 지정된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이 가장 눈길을 끕니다.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은 목탑지의 심초석 남쪽 중앙 끝단에 마련된 장방형 사리공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가장 바깥에 청동제의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으로 만든 사리호, 그리고 보다 작은 금제 사리병을 중첩하여 안치한 3중의 봉안 방식을 취하였다.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귀한 재질인 금, 은, 동을 순서대로 사용한 백제 사리장엄의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청동제사리합에는“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명문은 사찰(刹)의 건립시기, 사리기의 제작시기 등을 알려주고, 더불어 사찰의 건립 배경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은 현재까지 확인된 국내 사리기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사리장엄구로 가치가 높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비록 왕흥사의 옛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웠을지 짐작이 갑니다.

백마강을바라다보는백제의국찰왕흥사지 1
 
왕흥사지를 가로지르는 길 양옆으로 잘 닦여진 절터가 있고 절터 뒤로 나지막한 야산이 있습니다.

백마강을바라다보는백제의국찰왕흥사지 2
 
건물이 있었던 자리를 약간 높이 다듬어 올려놓았는데 더 큰 것이 금당지로 보이며 작은 게 목탑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백마강을바라다보는백제의국찰왕흥사지 3
 
산 아래에는 비닐로 덮어 놓은 곳도 있어 발굴조사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백마강을바라다보는백제의국찰왕흥사지 4
 
묘지처럼 흙은 쌓아 놓은 곳은 가마터가 있었던 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백마강을바라다보는백제의국찰왕흥사지 5

백로들이 왕흥사지의 주인이라도 된 듯 여기저기를 날며 낯선 손님을 경계하였습니다.

오는 10월 1일부터 열리는 제68회 백제문화재에 오시는 분들은 강 건너 왕흥사지에도 들러 백제의 불교에 대하여 생각하는 기회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대로님의 다른 기사 보기

[대로님의 SNS]
  •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22775540405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