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여행

삼일절 수당 이남규 아산 외암촌 냇가에서 피살되었던 공간의 의미

2022.03.01(화) 00:22:14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2022년의 삼일절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코로나19가 이제 사람들과 공존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직 추위가 완전하게 물러가지는 않았지만 삼일절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야외로 나들이를 해보았다. 

삼일절수당이남규아산외암촌냇가에서피살되었던공간의의미 1


삼일절수당이남규아산외암촌냇가에서피살되었던공간의의미 2


삼일절수당이남규아산외암촌냇가에서피살되었던공간의의미 3


예산에 살던 집이 남아 있는 수당 이남규 선생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피살되었다.
아산의 외암천이라는 천변에서 자신의 아들과 함께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삼일절수당이남규아산외암촌냇가에서피살되었던공간의의미 4



외암천은 외암 민속마을로 이어진다.
세상이 그렇게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법이다.
삶에서 소신을 가진 사람이 많지가 않다. 가치 기준도 달라질 수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목도 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소신을 바꾸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수당 이남규 선생은 소신을 잃지는 않았던 사람이다. 

삼일절수당이남규아산외암촌냇가에서피살되었던공간의의미 5


이곳은 개인의 땅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순절했다고 해서 그 순절지를 알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들어가는 길목에 큰 개가 있으니 가보실 분들은 조심해서 들어가면 된다. 

삼일절수당이남규아산외암촌냇가에서피살되었던공간의의미 6


1861년 허전(許傳)의 문하에 들어가 일찍이 유학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남규는 1898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내고, 1902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지만 1894년 5월 일본공사 오도리[大鳥圭介]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자 상소를 올려 일본의 무도함을 규탄할 것을 요구하였고, 갑오경장의 부당성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의 통분함을 상소하였지만 받아 들어지지 않자 예산으로 돌아온다. 

삼일절수당이남규아산외암촌냇가에서피살되었던공간의의미 7


한산 이 씨하면 역시 목은 이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역시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스승이기도 했던 이남규 선생이 이곳에서 명을 달리했다.
주소는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595-136이다. 

삼일절수당이남규아산외암촌냇가에서피살되었던공간의의미 8


외암천에서 조금 더 나오면 온양천이 흐르는데 온양천을 따라가다 보면 송악저수지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은 얼음이 녹지 않아서 설경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가 있었다. 
삼일절수당이남규아산외암촌냇가에서피살되었던공간의의미 9

하늘에는 사시의 운행이 있고, 땅에는 자원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다스림이 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멀리 탁 트인 곳에 나오지 않으면 이런 풍광이 있는지 모르고 높은 산에 오르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 모른다. 

삼일절수당이남규아산외암촌냇가에서피살되었던공간의의미 10


1906년 병오의병 당시 홍주에서 거의 하였던 민종식(閔宗植)이 일본군에 패하여 은신을 요구하자 숨겨 주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의병과 관련 있다 하여 1907년 공주옥에 투옥되었다가 며칠 뒤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이충구(李忠求)와 함께 피살되었지만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기억되고 있다. 
 

지민이의 식객님의 다른 기사 보기

[지민이의 식객님의 SNS]
  • 페이스북 : www.facebook.com/hongdae
  • 트위터 : www.twitter.com/chdspeed
  • 미투 : chdspeed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