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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역동적인 윤봉길 의사 모습, 위엄과 존경의 랑데부로 다가와

윤봉길 의사의 재발견

2022.02.16(수) 13:25:02 | 홍경석 (이메일주소:casj007@naver.com
               	casj007@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동포 박진(朴震)의 종품(말총으로 모자와 일용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는 윤봉길 군이 홍구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다가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제가 채소 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는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그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백범일지] P. 331에 등장하는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 중 한 부분이다.
여기서 윤봉길은 이른바 일본 천황의 천장절(天長節) 경축식 행사 때 모일 일본군 대장 등을 죽일 결심을 피력한다.

멀리서 봐도 언제나 늠름한 윤봉길 의사 동상

▲ 멀리서 봐도 언제나 늠름한 윤봉길 의사 동상


참고로 ‘천장절’은 일본의 천황 탄생일로 일본인들의 공휴일이다.
이에 감동한 백범 선생께서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成功)한다는 것을 비유한 유지경성(有志竟成)으로 화답했다.

이어 상해의 병공창장 송식표에게 연락하여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도시락 안에 폭탄을 장치하여 3일 이내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는 가운데 ‘운명의 날’인 4월 29일이 점점 임박하였다.
당일 새벽에 백범 선생은 윤봉길 군과 마지막 아침밥을 먹는다.
걱정이 되어 얼굴을 살폈으나 윤 군은 평소처럼 태연자약했다.
마침내 오전 7시를 알리는 벽의 종소리가 들렸다.
윤 군은 자기 손목시계를 풀러 김구와 바꾸자고 했다.
“제 시계는 6원을 주고 산 것이고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최후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윤봉길 군에게서 백범 선생은 더 깊은 신뢰와 존경까지 느낀다.

윤봉길 의사 소개 글

▲ 윤봉길 의사 소개 글


윤봉길 의사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상해) 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윤봉길은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그는 나라가 망하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1930년에 만주로 떠났다.

독립정신

▲ 독립정신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를 향해 갔다.
1931년 8월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머물면서 우선 경제생활을 위해 한국인인 박진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金九)를 찾아가 그의 뜻을 말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그즈음, 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시라카와 대장의 지휘하에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일본군은 일본 국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폭탄(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였다.

뒤에서 봐도 존경스런 윤봉길 의사

▲ 뒤에서 봐도 존경스런 윤봉길 의사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 단장 가와바다는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케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윤봉길 의사는 오늘도 빛난다

▲ 윤봉길 의사는 오늘도 빛난다


그는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32년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蔣介石·1887~1975) 전 대만 총통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격찬하였다.

윤봉길 의사에겐 1962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백범 선생은 해방 뒤 귀국하자마자 “천하 영웅”이라며 칭찬해 마지 않았던 윤봉길 의사의 예산 본가를 찾아 ‘윤봉길 의사 기념제’를 거행했다. 

“윤봉길 의사님, 정말 존경합니다!”

▲ “윤봉길 의사님, 정말 존경합니다!”


대전 충무체육관 입구에는 윤봉길 의사 동상이 우뚝하다.
오른손에 수류탄을 들고 힘차게 던질 것 같은 역동적인 모습이 위엄과 존경의 랑데부로 다가온다.
장제스 전 대만 총통이 썼던 윤봉길 의사에 대한 찬사인 ‘장렬천추’ 글씨 역시 여전히 또렷하다.
참고로 사진의 ‘장중정(蔣中正)’이란 장제스 전 총통의 본명이다.
중차대한 대선을 앞두고 보니 새삼 윤봉길 의사와 같은 진정한 ‘천하 영웅’이 그리웠다.

푸른 하늘도 윤봉길 의사의 쾌거를 칭찬했다

▲ 푸른 하늘도 윤봉길 의사의 쾌거를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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