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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해 살아라' 가르침처럼

예산군 광시 용두리, 할아버지·아버지 이어 3대째 이장 황인승씨

2022.01.24(월) 16:00:24 | 관리자 (이메일주소:srgreen19@yesm.kr
               	srgreen19@yesm.kr)

할아버지·아버지에 이은 3대 황인승 이장. ⓒ 무한정보신문
할아버지·아버지에 이은 3대 황인승 이장. ⓒ 무한정보신문

“‘여기 집터가 이장 나오는 자린가보다’ 그랬다니까요”

예산군 광시 용두리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이장으로 선출된 황인승(65)씨가 사람 좋게 웃는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할아버지 황의호씨가 맡았던 1950년대 말~1960년대 초는 마을회관이 없어 아래채가 주민 사랑방 노릇을 했단다. 마을에서 손꼽힐 정도로 큰 집이었다. 아버지 생전에는 충북에서 돌기와를 운반해 올리기도 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은 관리가 어려워 허물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무한천을 따라 너른 논이 펼쳐진 마을 초입에 있는 집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흰색 칠판이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해야 할 일 목록 옆에 정갈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

18일 마주앉은 그는 신임이장답게 마을을 향한 애정과 열정이 가득했다.

“이장은 봉사직이자 심부름꾼이에요. 보조사업이 있으면 꼭 필요한 사람이 지원받을 수 있게 해줘야 해요. 자기나 가까운 이를 먼저 챙기는 건 이장이 아니에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남을 위해 살아라’라고 항상 강조하셨어요.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동안만큼은 그렇게 할 거에요”

황 이장을 일찌감치 눈여겨 본 마을 어르신들은 수년 전부터 이장직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때는 일이 바쁘고 직책을 맡기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들어 ‘3년만 있다 하겠습니다’ 그랬어요. 그걸 기억하셨는지 이번에 새 이장을 뽑을 때 ‘이제 3년 지났으니 해야지’ 하시더라고요. 봉사에는 때가 있잖아요. ‘어차피 할 거라면 지금 하자’라는 마음에 기꺼이 승낙했어요”

 

할아버지·할머니(맨 앞줄)를 모시고 찍은 가족사진. 한 팔에 손주를 안은 아버지와 나란히 선 그(왼쪽 두번째)의 모습이 빼닮았다. ⓒ 황인승
할아버지·할머니(맨 앞줄)를 모시고 찍은 가족사진. 한 팔에 손주를 안은 아버지와 나란히 선 그(왼쪽 두번째)의 모습이 빼닮았다. ⓒ 황인승

지난 3일 임명장을 받아들자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큰 책임감도 들었다. 다음날 그가 찾아간 곳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산소였다. 생전에 허황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입 밖으로 낸 말은 꼭 지켰던, 언제나 본받고 싶은 두 분 앞에 절을 올리며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떠오르는 옛 추억이 반가운지 환하게 웃는다. ⓒ무한정보신문
떠오르는 옛 추억이 반가운지 환하게 웃는다. ⓒ무한정보신문

1936년에 태어나 10여년 전 고인이 된 아버지 황낙연씨는 1987년부터 1994년까지 8년 동안 이장을 지냈다. 경지정리사업에 앞장섰고, 광시면예비군제2중대장을 지내는 등 지역을 위해 힘쓴 공로로 내무부(행정안전부)·국방부장관과 충남도지사 등으로부터 표창을 받은 인물이다. 정부가 고 노태우씨와 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 시절 펴낸 ‘대한민국인물사’와 ‘한국인물연감’에 잇따라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 일대 논의 절반 정도는 밭이었어요. 제가 중학생 즈음에 경지정리를 했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잘 몰랐는데 돌아가신 뒤 알고 보니 업적이 많으셨어요. 대한민국인물사는 예산군을 통틀어 2명이 실렸는데 그 중 한 명으로 뽑히신 거에요. 지역에서는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 몸가짐을 항상 바르게 하려고 노력했죠”

황 이장은 6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젊은 시절 객지에서 살다 20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과수원을 조성해 사과와 복숭아,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있는 것처럼 동생들을 보살피고 식구들 쌀 보내줘라’라는 말을 남겼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증조할아버지부터 대대로 일궈 온 논밭에서 함께 농사를 지으며 곁을 지켰다.

“아버지도 좋고 저도 좋았죠. 처음 과수원을 할 때는 고생을 무척 했어요. 그걸 이겨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12년 전에 일을 하다 크게 다친 적이 있어요. ‘살기 어렵다’고 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였는데 다행히 지금은 건강해요. 그 일 이후의 삶은 ‘덤으로 산다’ 여기며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죠. 단, 어떤 일이든 내가 할 수 있는지 충분히 생각해보고, 되겠다 싶으면 마음먹고 해내요. 중간에서 포기할 것 같으면 시작을 안 합니다” 올곧은 성품이 엿보이는 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을 궁금해하니 사진 한 장을 내민다. 총각 때 서울에서 직원 네댓을 두고 LPG가스를 배달하는 사업을 하다 아내를 만나 29살에 결혼한 뒤, 천안으로 이사해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식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는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었고, 아버지는 한 팔로 손주를 안았다. 누가 봐도 가족이란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은 얼굴이다.

대를 이어 이장을 맡은 그가 더 나은 마을을 만들어가기 위해 강조한 것은 ‘화합’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갈등이 있었어요. 다른 지역에서 이사 온 주민들은 이곳의 정서와 관습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나고 자란 사람들과 의견차가 생기기 마련이에요. 잘 설명하고 이해시키면 수긍해요. 같이 끌어안고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게 이장의 역할이에요. 제가 선·후배를 둔 중간 세대에요. 다리 역할을 할 사람으로 인정하고 뽑아주신 것 같아 더 힘이 생겨요. 형처럼 위하고 아우처럼 배려하며 일을 해나가려고 해요. 제 얘기를 잘 따라주는 청년회를 믿고 어르신들을 잘 보필하며 마을에서 생기는 어려운 점을 행정에 적극 건의할 거에요. 소외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도록 면에도 신경써주길 부탁했어요”

 

할 일 목록을 써놓는 칠판에 다짐을 적었다. ⓒ 무한정보신문
할 일 목록을 써놓는 칠판에 다짐을 적었다. ⓒ 무한정보신문

설 명절은 아내, 아들과 보낼 계획이다. 코로나19가 생기기 전에는 명절과 제사 때마다 장남인 그의 집에 6남매가 모이곤 했지만, ‘동네분들에게 누가 될 수 있으니 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싶으면 살그마니 와 산소에 술 한 잔 올려드리고 가라’고 했다고 한다. 얼른 감염병이 종식돼 마스크를 벗고 가족들을 다시 만나 웃음꽃을 피우는 게 소망이다.

48가구 60여명이 살고 있는 고향 용두리는 이웃들 모두 내것 네것없이 우애좋게 잘 지내는, 푸근한 어머니같은 곳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것을 보면 누군가 함께 와서 들어주고,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주는 곳.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럴 것이다. 그리움만 커져가는 나날이지만, 서로를 지키는 마음을 모을 때 함께할 날이 가까워지리라는 믿음으로 오늘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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