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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청양의 중심이었던 공간에 정산향교에서 삶을 관조해봅니다.

2021.07.26(월) 20:29:04 | 연주의 꿈꾸는 다락방 (이메일주소:yeonju7890@naver.com
               	yeonju7890@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궁극의 앎을 추구하는 것은 동양과 서양을 가리지 않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학문이라는 것은 어떤 한 과정을 통과하기 위한 관문이 아니라 지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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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교육과 관련된 분야에 일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지만 서양식 교육이 수치로 측정되는 과정 속에 공부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소유한 물질보다 더 큰 만족감을 보았던 생택쥐페리는 어린 왕자에 자신의 생각을 녹여냈습니다.

"그들은 소유한 물질에서 얻은 행복의 환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직 행동에 대한 열기와 창조에서 오는 만족감이다." -안투안 드 생택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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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은 각각의 다양성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그 일치성 안에서 연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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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자리한 향교를 보면 과연 옛날의 교육기관에 불과했을까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교육과정은 한국전쟁 이후에 100년도 안된 시기에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향교의 교육은 수백 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서당-향교-성균관으로 이어지는 교육과정으로 끝나지 않고 스스로 깨우침을 있게 하는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정산향교로 올라서면 정산면이 내려다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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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찾아가 본 향교는 바로 이곳 정산향교였습니다. 다른 공부도 많이 했지만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향교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찾아갔던 곳입니다. 전묘후학이라는 것도 당시에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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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현은 홍주ㆍ청양ㆍ공주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유인(儒人)들이 많이 정착하였다 하여 정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인이라고 하면 유학자들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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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명예나 직업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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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인물인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에 감금되었다가 선생은 1906년 11월 17일(양력 1907년 1월 1일) 단식으로 저항해 결국 순국하였는데 이때 상여가 마련돼 이곳 정산(定山) 본가로 운구하는 곳에 따라 노제로 전송하고 울부짖는 민중들 때문에 하루에 10리 밖에 운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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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향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847년(헌종 13)에 중건하였으며, 1927년에 명륜당 등을 보수하였다고 합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대성전, 3칸의 명륜당, 4칸의 동재(東齋), 3칸의 서재(西齋), 5칸의 강학루(講學樓), 5칸의 전사청(典祀廳),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등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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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아도 오래된 목조구조물은 정산향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공부를 했던 학생들도 알았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으로 봐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다는 것은 산, 고요한 시간, 꽃으로 덮인 세상, 잔잔하게 흘러가는 물 보이지 않는 것과 더불어 드 넓은 영혼은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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