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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역사여행,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발자취를 찾아

2021.07.11(일) 12:01:09 | 네잎클로버 (이메일주소:venusmi8@hanmail.net
               	venusmi8@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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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충절의 고장 예산하면,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간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인데요, 예산 여행 중, 아이들과 함께 윤봉길의사기념관을 찾아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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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충의사 일원에 도착하니, '윤봉길의사사적비'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공립 박물관인 윤봉길의사기념관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해 있는데요, 이곳은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현충시설로 윤봉길 의사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2년 10월 14일, 윤봉길 의사 유적(사적 제229호)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 유적은 크게 생가인 광현당과 성장가인 저한당, 농촌부흥운동을 한 부흥원, 유물을 전시한 기념관,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모신 충의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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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씨 속에 먼저 윤봉길의사기념관으로 향했는데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방문객들의 발길이 쉼 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윤봉길의사기념관은 윤봉길 의사의 독립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기념관 옆에는 매헌 윤봉길의사어록탑이 세워져 있는 모습입니다.
기념관 내에는 윤봉길 의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해 1932년 4월 29일 김구 선생과 작별할 때 정표로 바꾸어 가진 회중시계, 농민독본 등 윤봉길 의사가 남긴 유품과 유물 등 귀중한 자료들이 전시·보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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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도중도 생가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18년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2학년 때,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며 자퇴하고, 그 후 성주록의 오치서숙(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습니다.
15세에 배용순 규슈와 결혼하였으며, 스승 성주록에게 매헌(梅軒)이라는 야호를 받았습니다. 무식이야말로 민족의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야학을 개설하여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등 농촌계몽운동· 문맹퇴치운동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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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23세) 망명 전까지, 교육과 농촌운동의 교재인 농민독본을 저술하였으며, 부흥원을 건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농민들이 자작자급으로 힘을 길러 갱생하자는 취재로 월진회(1929)를 조직하여 한일 무장투쟁론을 수용하였으며, 1930년 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중국 상해 임시정부를 향하여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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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2년 후,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백범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는데요, 1932년 4월 29일, 중국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및 상해 전승기념식에서 수통형 폭탄을 투척하여 의거를 단행하였습니다.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헌병에게 현장에서 연행되어 1932년 5월 25일 사형선고를 받고 일본으로 압송되어 같은 해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25세의 짧은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봄빛으로 가는 길(매헌 윤봉길 상)
▲ 봄빛으로 가는 길(매헌 윤봉길 상)

기념관 관람 후, 이정표를 따라 윤봉길 의사 생가 쪽으로 이동해 보았습니다.
생가로 향하는 길목에는 액자형 패널로 윤봉길 의사를 포함한 48인의 대표 독립운동가분들을 소개하고 있었는데요, 이곳은 윤봉길 평화축제 거리 테마 전시 공간으로  4.29 상해의거의 역사적 의미와 함께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주요 독립운동가 48인의 독립운동을 알리는 전시공간으로 조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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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저한당은 '어려운 한국을 건져낼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저한당은 윤봉길 의사가 4세부터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민족운동을 하시던 곳으로, 윤봉길 의사가 1932년 순국하고 1945년 해방이 되던 날까지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받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1972년 8월까지 윤봉길 의사의 유족이 살았지만,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보수작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저한당 주변으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고, 윤봉길 의사 동상과 윤봉길의사의거기념탑, 체험관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 생가(저한당)
▲ 윤봉길 의사의 생가(저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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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저한당에서 지방하천인 대지천을 지나면 바로 생가 광현당으로 이어집니다.
광현당은 '빛이 나타나는 곳'이란 뜻으로,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 4세까지 살던 집인데요, 광현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윤봉길 의사의 증조부 때부터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윤봉길 의사는 훗날 이 집의 사방으로 냇물이 흐르는 모습이 섬과 같다고 하여 이곳을 '한반도 가운데 위치한 섬'이란 뜻으로 '도중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광현당 주변으로는 농촌부흥운동을 위해 설립한 부흥원과 나라꽃인 무궁화가 식재되어 있고, 키다리 나무 아래 방문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휴식공간이 쾌적하게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생가(광현당)
▲ 윤봉길 의사의 생가(광현당)

윤봉길 의사 유적지에는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봉안한 충의사가 있습니다. 충의사 주변으로 작은 연못이 있으며, 계단을 오르면 윤봉길 의사의 부인 배용순 여사의 묘가 인근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광복 후,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현재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는데요, 참고로 필자가 서울 효창공원 방문 시 담았던 윤봉길 의사의 묘역 사진을 함께 올려봅니다.

예산 충의사
▲ 예산 충의사

광복 후, 중국에서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가분들의 유골을 찾아 국내로 봉환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일본 가나자와시 노다신 육군 묘지에 인접한 공동묘지에 13년간 매장되었던 윤봉길 의사의 시신은 임시정부 유해발굴단과 가나자와에 거주하는 한인 청년들의 노력으로 광복 이듬해인 1946년 3월 발굴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추도식이 거행되었으며 1946년 7월 7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이 거행되며 세 분의 유해는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예산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윤봉길 의사의 애국혼이 살아 숨 쉬는 충의사 일원을 찾아 의사의 삶을 되돌아보고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려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좌 안중근 의사 가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좌 안중근 의사 가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윤봉길의사기념관
-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 관람시간 : 하절기 3월 ~ 10월 (오전 9시 ~ 오후 6시), 무료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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