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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영조가 사랑했던 딸이었던 화순옹주의 홍문

2021.07.08(목) 17:16:13 | 서영love (이메일주소:hush7704@naver.com
               	hush7704@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보통 왕족이라고 하면 정말 누구나 부러운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렇게 산 사람들은 많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비극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도 여럿 있습니다. 그중에 사도세자도 포함이 됩니다. 영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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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탁 트인 풍광이 있어서 돌아보기에도 좋은 곳입니다. 화순옹주의 어릴 때로 돌아가 보면 영조와 후궁인 정빈 이 씨 사이에서 태어난 화순옹주는 사실 둘째 딸인데 장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화순옹주의 언니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세상을 떠나고 오빠인 효장세자 역시 왕세자로 책봉되고 난 뒤 9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즉 화순옹주와 사도세자는 비슷한 운명에 처했으며 제명에 세상을 떠나지 못하게 된 것도 비슷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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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이라 함은 완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나마 여성의 삶은 남성의 삶보다는 덜 치열했습니다. 사도세자가 딸로 태어났다면 영조의 이쁨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화순옹주의 삶 자체는 불행스러웠지만 영조의 사랑은 듬뿍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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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화순옹주의 옹문이 남아 있습니다. 건물은 사라지고 기둥터만 남아 있는 곳입니다. 화순옹주는 글과 글씨로 이름을 날린 추사 김정희의 증조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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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의 옹문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곳은 열린 곳입니다. 완벽함을 추구했던 영조 역시 인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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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그를 잃게 된 주된 요인이 소론과 남인에게 있다고 굳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남인과 소론 일파는 궁녀인 순정을 이용해 정빈 이 씨와 효장세자를 저주하였고 화순옹주 역시 홍역에 걸렸을 때 순정이 몰래 독약을 먹여 죽이려 했던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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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를 너무나 사랑했던 영조는 남편인 김한신이 죽고 나서 제발 살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화순옹주가 죽기로 마음먹고 곡기를 끊었을 때 아버지인 영조가 체면 같은 것을 버리고 미음을 먹으라고 했는데 화순옹주는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했는데 영조는 그걸 불효라고 생각하고 열녀문 내리길 거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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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족이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는 있습니다. 세상의 일이 맘대로 되는 것이 많지 않지만, 그중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일 또한 쉽지 않은데 왕족은 더 그러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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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인 김한신이 죽고 난 후 영조는 체면을 버리고 그녀를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옹주여, 제발 숟가락을 들라." 아버지의 간청에, 미음 죽 위에 놓여있는 그 숟가락을, 옹주는 마지못해 들었습니다. 죽을 입에 넣는 듯했으나 그녀는 모두 토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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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딸은 총 8명이 있었는데 화억옹주, 화순옹주,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 화령옹주, 화길옹주입니다. 남편이 죽고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 화순옹주가 1758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자 불과 4년 뒤인 1762년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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