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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천년의 시간 흐르는 서산, 명종태실 알현

2021.04.23(금) 08:29:37 | 금산댁 (이메일주소:dksjks22@hanmail.net
               	dksjks22@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 서산의 해미 쪽으로는 천년의 시간이 흐른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국보문화재 서산마애삼존불이 일단 큰 역할을 한다. 이어서 보원사 터, 청벚꽃 피는 개심사, 조선 명종대왕태실, 해미읍성 등 백제, 고려, 조선의 귀한 문화유산이 이 길 따라 펼쳐져 있다. 한 지역의 문화재가 이처럼 다채로울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중에서 명종 태실에 주목해 보자. 가야산 자락 서산시 운곡면 태봉리의 태봉산 정상에 있는 조선 제13대 명종임금의 태실.
태실은 조선왕실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태를 항아리에 봉안한 뒤 조성한 시설을 말한다. 태를 보관한 작은 돌방이다. 조선은 태를 아기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아기의 처음을 소중히 여겼다.

태실을 향해 가는 길 초입.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태실을 향해 가는 길 초입.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저만치 오르면 태실이 있다. 힘을 내본다.
▲ 저만치 오르면 태실이 있다. 힘을 내본다.

저기 태실이 보인다. 2018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 저기 태실이 보인다. 2018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조선왕조 태실은 생명존중 사상을 담았다. 특히 명종태실은 미술사적 가치가 뛰어나고 보존 상태도 좋아 지난 2018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 있는 태실 중에서는 유일한 보물이다.

마을이름도 태를 봉안한 지역이므로 ‘태봉리’가 되었으며, 태를 봉안한 산은 ‘태봉산’으로 부른다. 명종태실은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 옛 태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태실에 이르기전 간판
▲ 태실에 이르기전 간판

돌로 새긴 태실 설명문
▲ 돌로 새긴 태실 설명문

이렇게, 국한문 혼용으로 씌어져 있다.
▲ 이렇게, 국·한문 혼용으로 씌어져 있다.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이자, 인종의 동생이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수렴청정했던 어머니 문정왕후 사후 선정을 펴려 노력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문화재들이 파헤쳐지고 도굴되어 망실을 겪었다. 태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조선 왕조 태실의 상당수가 다른 자리로 옮겨졌거나 변형됐다. 관련 기록도 유실된 경우가 많다.

태실 앞에 섰다. 가슴이 벅차다.
▲ 태실 앞에 섰다. 가슴이 벅차다.

라고 씌여진 태실
▲ 대군춘령아지씨라고 씌여진 비석

저기, 만백성을 보고있다.
▲ 저기, 만백성을 보고있다.

이 비에는 라고 씌어있다.
▲ 이 비에는 주상전하 태실비라고 씌어있다.

반면 명종 태실은 건립 후 482년 동안 처음 지어진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실록에 관련 기록도 상세히 남아 있다. 학계는 명종 태실이 한국 미술사의 태실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본다.

명종 태실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태봉산은 해발 100m 정도로, 큰 언덕에 가깝다.
태실은 받침돌 위에 태를 넣은 둥근 몸돌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바깥에는 난간을 둘러놓았다.
비는 3기인데, 오른쪽의 비는 태실을 만들면서 함께 세운 것으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형태이다. 왼쪽의 비는 왕자전하의 태실비로, 받침돌 위에 비몸과 용을 새긴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가운데의 가장 크고 화려한 비는 주상전하의 태실비로, 거북받침 위에 비몸을 올리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에 해당되는 바닥은 여러 장의 화강암 판석을 8각형으로 깔아놓고 주변에 8각의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태실 중앙에는 종 모양의 태함을 안치해 놓았으며 태함 위에 팔각의 옥개석을 올려놓았다.명종태실 정면에는 비석 세 기가 나란히 서있다.

비석 3개가 나란히 서 있다.
▲ 거북이 비석 3개와 나란히 서 있다.

천년의시간흐르는서산명종태실알현 1

500년 세월 견뎌내고 후손들을 맞아주신 태실.
▲ 500년 세월 견뎌내고 후손들을 맞아주신 태실.

남쪽 비석은 명종이 태어나고 4년 후인 1538년에 태실을 조성하며 세운 것이다. 비석 정면에는 대군춘령아지씨태실(大君椿齡阿只氏胎室)이라고 새겨져 있다.
북쪽 비석은 명종이 즉위하던 1546년에 세운 비이다. 비석 정면에는 왕자전하태실(王子殿下胎室)이라고 새겨져 있다.

중앙에 서있는 비석은 거북모양의 받침돌에 4장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비석 머릿돌은 용과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본래 태실의 모습은 태함을 올려놓는 기단부와 그 위로 태를 넣은 태함이 안치되어 있다. 태함 주변에는 돌로 만든 난간과 태실의 주인을 알리는 비석 등이 있다.

태실 너머 백성들이 사는 땅.
▲ 태실 너머 백성들이 사는 땅. "하루빨리 코로나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주소서"

코로나19로 나라도 어렵고 전 세계가 혼란스러운 이때, 선조들의 후손 보살핌의 영험으로 빨리 이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굽어 살펴주시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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