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에 모시옷 입고 나가 논두렁에 빠진 남편
한여름 최고의 옷감, 한산모시
2020.08.13(목) 20:01:00 | 황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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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ikesa@hanmail.net)
▲한산세모시
열여섯 살에 시집온 새색시는 시집온 그날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새댁의 남편은 차남으로, 병약한 형님이 별세하자 장남의 책임감을 스스로 어깨에 짊어졌다. 일가친척들이 한마을에 살았던 시절이다. 남편은 자신의 아내와 형수, 그리고 네 명의 조카들을 건사해야 했다. 새댁은 형님(윗동서)의 매운 시집살이를 살았다. 시집은 왔지만 남편과 합방은 10년이 지나서였다. 새댁의 나이 스물다섯 되던 해, 첫아들을 낳았다.
옷을 지어 입던 시절이었다. 새댁은 농사짓는 틈틈이 베틀에 앉았다. 아이들이 잠든 밤에 해진 옷을 깁고 꿰매는 건 새댁의 일상이었다. 남편은 말없이 과묵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었을까. 하루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호롱불 앞에서 아내가 바느질을 할 때, 남편은 "옥단춘전", "심청전", "장화홍련"을 읽었다. 남편에게 모시옷 한 벌을 해준 어느 장날, 느지막이 돌아온 남편의 모시옷이 진흙에 얼룩져 후줄근했다. 술에 취해 집으로 오는 길에 논두렁에서 넘어진 것이다.
모시옷을 입고 논두렁에 넘어진 남편은 잠든 6남매를 모두 깨워 집합시킨다. 그때부터 일장연설이 시작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제는 변함이 없다. 그 주제를 듣고 자랐던 둘째 아들이 지금의 내 남편이다.
서천의 한산모시관을 방문하고 전시관에 들어서자 나는 시어머니(엄니)생각에 뭉클했다. 고급스럽고 단아한 저 옷감이 만들어지기까지 베틀 앞에 앉아 베를 짜기까지의 많은 과정이 있다. 그 품질을 결정한다는 ‘모시째기’는 별다른 도구 없이 이[齒]를 사용한다고 한다. 아랫니와 윗니로 태모시를 물어 쪼개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 일을 수백 번 반복하니 모시째기는 수월해지겠지만, ‘이에 골이 파지며’ 또 이가 깨지기도 한다. ‘이골이 난다’는 말은 이런 반복작업에서 생겨난 말이다. 잠이 쏟아져서 베틀에 앉아 졸기도 했다는 엄니. 졸음 앞에 당신 이가 아픈 건 다음이었단다.
모시는 언제부터 재배되었을까. ‘통일신라시대 한 노인이 약초를 캐기 위해 건지산에 올라가 처음으로 모시풀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가져와 재배하기 시작하여 모시짜기의 시초가 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는 전시글이 있다.
백제시대 때 모시풀을 처음으로 발견한 곳이 바로 건지산 기슭이었기 때문에 모시관을 이곳에 지었단다. 모시잎은 우리가 먹는 깻잎과 모양이 비슷하다. 모시풀은 습기가 많고 기온이 높은 곳에 잘 자란다고 한다. 한산모시관 입구로 들어가는 한 켠엔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심어 놓은 모시풀이 있다. 언뜻 초록빛 깻잎과 흡사하다.
한여름 최고의 시원한 옷. 엄니는 여름에 모시옷을 입고 항상 부채를 손에 들었다. 선풍기나 에어컨 바람이 당신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했다. 정갈하고 우아하기까지 한 여름의 전통옷감. 전시관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시의 역사와 시대별 전통복식 등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입었던 전통의 모시. 그러나 현대에 더 모시의 우수성을 체감하게 되는 모시. 모시실을 베틀에 올려 베 한 필을 만들어내는 데는 무려 5개월이나 걸린다고 한다.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결이 가늘고 고울 뿐 아니라 통풍까지 잘되는 우리나라 여름 최고의 옷, 모시. 그 옷을 입고 장에 나가 무거운 책임을 잠시 내려놨을 가장의 모습이 그립고 보고 싶은 엄니 모습과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