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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충청도 관찰사 강백년을 아시나요?

청백리의 표상…, 넉 달 전 공주시 '이달의 역사인물'

2020.04.27(월) 22:39:28 | 임정화 (이메일주소:dsfjkjfsjf@hanmail.net
               	dsfjkjfsjf@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네 달 전인 지난 12월, 공주시가 ‘이달의 역사인물’로 선정해 홍보 보도를 했던 인물 강백년 선생. 그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청백리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1603년에 태어나 1681에 돌아가신 인물, 오늘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코너에서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강백년 선생 취재 내용을 포스팅하려 한다.
 
선생은 진주 강씨 문중의 대표적인 인물로, 호는 설봉(雪峯)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래서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사우를 문정사라 부른다.
  
충청도관찰사강백년을아시나요 1
 
문정사 정문 역할을 하는 삼문이다.
 
대개 삼문(三門)은 대궐이나 큰 사찰 등의 앞에 있는 문을 뜻한다. 정문, 동협문, 서협문 셋이 있다고 해서 삼문으로 칭한다. 삼문 중앙 앞에 물기문(勿欺門)이라고 씌어 있는데 물기문이란 '남을 속이지 말고 해하지 말며 올곧게 살라'는 뜻이라 한다. 선생의 성품이나 표상을 잘 표현한 문구인 듯하다.
  충청도관찰사강백년을아시나요 2
 
진주강씨 설봉공파 종회가 세운 사우 건립 표지석이다.
 
괴거에 급제해 조정에서 근무하면서 55년간 무려 4대에 걸친 임금을 모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훌륭한 업적을 쌓고 학문과 인품이 고매하고 문장과 덕을 겸비해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라는 내용 등이 함께 적혀 있다.
  
충청도관찰사강백년을아시나요 3
 
삼문 바로 왼쪽에 세워져 있는 강백년 신도비와 비각인데,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평생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운 비(碑)를 말한다. 중국에서 넘어온 방식이라 하는데 묘 앞에 길을 트고 석주(石柱)를 세워 표하였던 것을 신도라 칭했다고 한다. 
  충청도관찰사강백년을아시나요 4
 
신도비가 크고 웅장하다. 사대부의 신도비는 웬만한 위업과 공훈을 세웠거나 도덕과 학문에 투철한 자들의 묘 앞에 7~8척(尺) 되는 큰 비를 세웠다.
 
조선시대 이후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업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때에는 군왕보다도 위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의 사대부의 신도비는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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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사 본관 내부인데, 밖의 출입문인 삼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담장 밖에서 촬영한 것이다.
  충청도관찰사강백년을아시나요 6
 
문정사 왼쪽편에서 바라보니 저만치 낮은 구릉처럼 선생의 묘지가 보인다.

선생은 1627년(인조 5)에 문과에 급제, 1653년(효종 4) 좌승지에 오르고 충청도와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660년(현종 1)에 예조참판으로서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선생은 1653년(효종 4) 충청도 관찰사로 공주에 부임해 충청감영을 대대적으로 복원하고 봉황산 아래의 옛터(현 공주대부설고등학교)로 옮겼다. 이전할 때 들어간 비용은 감영이 환곡의 출납을 절약해 마련했으며, 기와와 벽돌은 목재와 함께 금강 상류에서 뗏목으로 날라 1654년 봄 완성했다 한다. 충청감사 때에는 호서에서 대동법을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을 잘 처리하여 호서인의 칭송을 받았다. 
   충청도관찰사강백년을아시나요 7

선생은 만년에 고금의 가언(嘉言)과 선정에 관한 것을 수집하여 ‘대학’의 팔조를 모방한 ‘한계만록’을 지었다. 그는 이렇게 지은 책을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을 경계하는 자료로 삼았는데, 항상 말하기를 "평생에 큰 허물이 없는 것은 모두 이 책의 공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한계만록은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고 한다. 또 약간의 시문이 실려있는 ‘설봉집’도 있다.
 
충청도관찰사강백년을아시나요 8

선생은 재직 중 많은 관직을 거쳤는데 그중 대표적인 중앙직만으로도 대사간, 대사헌, 지신사, 대사성, 예조판서 등을 들 수 있다. 1690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특히 관직 재직 중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아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다.
  충청도관찰사강백년을아시나요 9
 
기사와 무관한 바람이지만 코로나가 좀 빨리 사라져서 이 마을 저 마을 충청남도와 온나라 전체에 경제의 활력이 넘쳤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강백년 선생에게 부탁드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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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중앙에서 내려다 본 마을 전경인데 문정사와 삼문, 신도비 비각 등이 보이고 저만치와 멀리 산자락과 공주시가지 방향이 보인다. 풍요롭고 고즈넉하고 조용하며 평화롭다.
 
선생은 평생 향락을 일체 좋아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이 치닫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고고하게 스스로를 구별하여 혹시라도 자신을 더럽힐까 조심하였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증거 중 하나가 평생토록 첩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는 곳이 비록 초가집 두어 칸에 풍우를 가릴 수도 없고, 맨밥과 거친 밥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치 궁핍한 선비와 같아서 여느 사람들은 선생이 벼슬과 명망이 높은 관원이었음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자면 충청남도청 격이었던 당시의 충청도포정사. 강백년 선생이 근무했던 곳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충청남도청 격이었던 당시의 충청도포정사로 충청감영 역할도 했던 곳이고, 1600년대에 강백년 선생이 근무했던 곳이다.
 
충청도포정사 문루 현판
▲충청도포정사 문루 현판

문루 오른쪽에 강백년 선생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문루 오른쪽에 강백년 선생에 대한 기록이 있다
 
포정사 안쪽 본관격인 선화당(저 멀리 중앙 건물)과 왼쪽의 동헌이 있다.
▲포정사 안쪽 본관격인 선화당(저 멀리 중앙 건물)과 왼쪽의 동헌이 있다
 
강백년 선생의 집무실이었던 충청도포정사로 가 보았다. 이곳은 요즘으로 치면 홍성에 있는 충청남도 도청인 셈이다. 당시 공주에 충청도 도청격인 충청도포정사가 있었으니 공주의 위세나 지명도, 의미는 정말 컸다고 할수 있다.
 
공주시청에서 보도한 홍보문에 따르면 “강백년은 충청 감사에 제수되어 대동법을 처음으로 시행했는데, 법에 맞도록 베풀고 백성의 편의에 힘썼으므로 호서지방에 지금까지도 칭송되고 있다”라고 했다. 특히 선생이 청빈한 삶을 살았던 것도 일찍이 부친이 뇌물 수수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었는데 그를 교훈삼아 평생 재물을 탐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
  
강백년의 청렴한 삶에서 후손들인 우리는 오늘 다시금 밝고 맑고 건전한 사회풍토를 되새겨 보고 또한 배우며 마음을 정갈하게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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