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결·신비· 자존심'이라는 꽃말을 갖고 있다는 노란 수선화를 떠올리면 어느 이른 봄,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제주도 한경의 용수포구에서 시작한 올레길을 걷다 길가에 피어 있던 수선화가 아직은 겨울이 다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날리던 눈바람에 파르르 떨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매일같이 오르내리는 산길에는 노란 산수유와 생강나무가 꽃을 피우고 며칠 사이 진달래가 부풀려가던 꽃망울을 터뜨려 수줍은 연분홍 꽃이 눈을 즐겁게 하더니, 그 길가 어느 집 울타리 안에 노란 수선화가 꽃을 피웠다.
 
예년과 지극히 다름없는 봄이건만,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위험에 선뜻 사람을 만나 어디로 떠나기가 망설여지는 우울한 날들의 연속이다. 그러더라도 노란 수선화가 꽃을 피웠으니, 백만 송이 수선화를 볼 수 있는 상서로운 땅으로 가기 위해 가야산 앞뒤에 있는 열 고을, 내포로 가는 길 위로 차를 달린다.
 
봄 밭갈이를 시작한다는 청명이 아직 며칠 남아 있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낮은 구릉의 밭들은 부지런한 농부들의 손길을 받아 잘 갈려져 있다.

그렇게 합덕을 지나고 당진 면천을 지나 서산 운산면 여미리에 있는 '유기방가옥'에서 차를 멈춘다. 두 해 전 사월의 봄날,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날에도 우리는 이 길을 따라 이곳에 왔다가 너무 늦어 다 시들어 버린 수선화만 보고 말아 아쉬웠었다.
 
기와지붕 사이 솟을대문이 눈길을 끄는 고택 앞에 서니 역시 굵은 소나무가 서 있는 뒷산을 중심으로 ∩자형의 얕은 좌·우 언덕이 집을 푸근하게 감싸고 남쪽을 향한 집 앞으로 툭 터져 있는 형태를 한, 역시 좋은 집터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유기방가옥
 

▲뒤에서 본 유기방가옥
 
그래서인지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지금이 있기까지 지난날 밑거름의 역할을 했던 분들이 이 집에서 나고 자랐던 모양이다.
 

▲유기방가옥 사랑채
 

 

 
재작년에 왔을 때는 없었던 솟을대문 높은 곳에 여미헌(餘美軒)이라는 오래된 가옥에 어울리는 큼직한 한문 간판이 붙어 있다. 그 뜻처럼 '여유로워 보이는 아름다운 집' 유기방가옥은 일제강점기인 1900년대 초에 건립되어 조선 후기 충청지방 고유의 격식을 갖춘 양반가의 고택으로 향토사적·건축학적으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2011년에 충남민속문화재 제23호로 등재되었다. 등재될 때 집안의 후손인 유기방씨 이름을 민속문화재 등록 명칭 그대로 써 '서산유기방가옥'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유기방가옥(재작년)
 

▲유기방가옥 앞 탱자나무(재작년)
 
이 유기방가옥이 유명세를 치르게 된 것은 집 주변과 뒷산 솔밭 사이 약 2만여 평에 100만 송이 수선화를 심어, 이렇게 수선화가 피어나는 봄날 열리는 '서산유기방가옥 수선화축제'가 SNS를 타고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찾기 때문이다.
  

▲수선화



뒷산의 소나무 그늘 밑의 수선화는 노란 꽃망울을 조금씩 부풀려가고 있고, 가옥의 양옆 양지바른 언덕에는 활짝 핀 수선화로 온통 노란 물결이다. 길가에 혹은 어느 집 담장 밑에 홀로 피어 있으면 참으로 외로워 보이는 이 꽃이 함께 있으니 이렇게 화사하다.
  

▲수선화


 

 

 

 

▲수선화와 유기방가옥
 

▲수선화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하듯, 외롭지 않으려면 함께 하여야 모양이다. 이 넓고 화사한 꽃밭 가운데서 사진 몇 장 담으려고 집중했더니 눈동자도 노란색으로 물이 들었는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 노랗고 불어오는 바람도 노란색이다.
  
서산유기방가옥
-소재: 충남 서산시 운산면 이문안길 72-10
-문의: 041-663-4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