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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매헌 윤봉길 의사를 기리다, 예산 충의사

청년의 시대 정신을 묻다!

2020.01.04(토) 22:53:15 | artlife (이메일주소:bestedu77@naver.com
               	bestedu77@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 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 (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인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
 -윤봉길 의사 어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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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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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꽃다운 나이에 누구보다 뜨거운 나라 사랑의 확고한 뜻을 세우고, 대한민국 독립의 초석이 되었던 윤봉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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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 침략 원흉 시라카와 등을 처단한 의거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쾌한 의거를 통해 대한 독립 운동의 활로를 마련하기까지 윤봉길 의사가 어떠한 삶을 살아 오셨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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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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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과 예향의 고장 예산에는 윤봉길 의사의 구국 의지와 민족혼이 서려 있는 ‘윤봉길의사기념관’이 있습니다. 윤봉길의사기념관에는 윤봉길 의사의 일대기와 업적에 대해 잘 알 수 있도록 유물과 교육, 체험시설을 잘 갖추어 놓았습니다. 기념관을 돌아보며 윤봉길 의사의 삶과 업적, 희생정신을 기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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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1세 때에는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셨다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12세 때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스스로 자퇴하셨습니다.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수학하며, ‘한시집’, ‘옥타’, ‘임추’ 등 300여 편의 한시를 남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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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9세가 되는 해에는 농민계몽, 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펴 나갔습니다. 농민계몽을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이란 교재를 집필하고, ‘야학회’를 조직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습니다. 1929년에는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復興院)'이란 단체를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월진회(月進會)'라는 농민단체를 기반으로 농촌자활운동을 펴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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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농촌부흥운동을 애국운동이라 하여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어 1930년 23세 되시던 해에 중국으로 망명하셨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장부(丈夫)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만주로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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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24세에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인 김구(金九)선생을 찾아가, 조국독립에 헌신할 뜻을 말하고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25세 때인 1932년 4월 26일에는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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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폭탄(수통 모양의 폭탄,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여 식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는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 등이 중상을 입고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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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32년 11월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셨습니다.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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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3년이 지난 1945년에 해방이 되었고 광복회 회장이셨던 이강훈 선생이 1946년 일본으로 건너가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모셔다가 서울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습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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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사당 ),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봉안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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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윤봉길의사기념관은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충의사’, 생가인 광현당, 성장가인 저한당, 농촌부흥운동을 하신 부흥원, 유물을 전시하고, 교육·체험시설을 갖춘 기념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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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당,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 4세까지 성장하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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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당, 윤봉길 의사가 4세부터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민족운동을 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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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당에서는 4세까지 사셨고,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인 23세까지는 저한당에서 지내셨습니다. 기념관에는 유물 56점이 전시되어 있고, 25세의 짧은 생애를 매직비젼 등 복합 영상모형으로 연출하여 충의정신의 학습장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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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사기념관, 충의사에서 윤봉길 의사의 숨결과 발자취, 조국에 대한 사랑을 잘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한민족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고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식어가던 독립운동의 활로가 열리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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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나라와 겨레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대한민국 독립의 초석이 되었던 윤봉길 의사!
민족혼을 일깨워 준 윤봉길 의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심장은 지금, 무엇을 위해 뛰고 있습니까??’
 
윤봉길 의사 기념관, 충의사
-위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전화: 041-339-8232~4, 8238(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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