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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12월, 윤봉길의사의 큰사랑을 가슴에 새겨봅니다

충남 예산 덕산면 ‘윤봉길의사기념관’에 가다

2019.12.12(목) 21:37:15 | 황토 (이메일주소:enikesa@hanmail.net
               	enikesa@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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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안온하여집니다.”
  
윤봉길의사기념관
▲윤봉길의사기념관

기념관을 둘러보다가 <백범일지>에 기록되었다는 윤봉길 의사의 말에 걸음이 멈췄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오히려 안온하여진다니.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905년 ‘을사늑약’이 있었고, 1910년 일본 제국이 우리나라 국권을 강탈했음을 공포한 날이다. 그 해 경술년에 나라가 치욕적인 일을 당했다고 해서 '경술국치’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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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의사가 사용한 명심보감, 벼루, 책상 등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기 전과 후의 나라환경이 그에게 살신성인의 대의(大義)와 대지(大志)를 품게 했을까. 윤봉길이 12세 되던 1919년은 3.1운동이 발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당시 일제식민지교육을 거부하던 그는 덕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을 자퇴하고 오치서숙(서당)에서 공부한다. 이후 야학을 개설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하며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부흥원을 설립, 농촌부흥운동을 주도하며 월진회를 조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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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무장투쟁론을 수용한 윤봉길은 23세 되던 1930년 3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진출하여 다음해 5월 상해에 도착, 김구 선생을 만나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전했다. 그의 나이 25세. 김구 선생과 상해의거를 계획하고 4월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했다. 드디어 4월 29일 홍커우공원에서 윤봉길은 의거를 단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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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의사의 순국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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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나라와 겨레에 바친 큰사랑 앞에서 나는 그의 부모와 아내, 그리고 아들 둘, 또 뱃속에 임신한 아이(유복자로 태어난 딸)생각에 콧등이 매웠다. 윤봉길의사기념관을 순서대로 관람하며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그의 항일의지를 생생하게 체험했다. 의거를 단행하기 위해 홍커우공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직전 김구선생과 맞바꾼 시계의 일화는 기념관에서 다른(성우)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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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백범일지>
 
백범일지 하권 '윤봉길의거'관련 글
▲<백범일지> 하권 '윤봉길의거'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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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집으로 돌아와 책꽂이에서 교양서로만 머물던 <백범일지>를 꺼냈다. 책 하권 ‘윤봉길의거’ 관련 글은 아래와 같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어 나를 주며 내 시계와 바꾸기를 원하면서, “저의 시계는 전랄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의하여 6원을 주고 매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인즉 나에게는 1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한다. 나는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주었다. 윤군은 입장의 길을 떠나는데 버스를 타면서 소지한 금전을 꺼내어 나의 손에 들려준다. “왜 약간의 돈을 가지는데 무슨 방해가 있는가?” “아닙니다. 버스삯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즈음에 버스는 움직인다. 나는 목멘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다. 윤군이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자 버스는 소리를 높이 지르고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을 향하여 달려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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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를 사는 요즘 스물다섯의 청년은 얼마나 어린가. 25세의 순정 무구한 윤봉길의사의 생은 너무나 짧았다.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포스터가 기념관 출입구에 있다. 들어갈 때와 달리 나오면서 다시 보는 윤봉길의사의 모습이 가슴에 저민다.

‘조국 광복의 초석이 된 홍커우공원의거’. 윤봉길 의사의 고귀한 죽음으로 오늘 우리는 지금껏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떠나는 버스차창으로 윤 의사는 김구선생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끝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 지금 두 분은 하늘나라에서 함께 계실 것이다. 그곳에서 부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마음이 저절로 성호를 긋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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