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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청백리 맹사성이 최영 장군의 집을 물려받은 까닭은?

국내 최고(最古) 민간살림집 '맹씨행단'의 유래

2019.12.06(금) 12:34:04 | 장군바라기 (이메일주소:hao0219@hanmail.net
               	hao021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인 맹사성 고택. 정면 4칸 측면 3칸의 소박한 'ㄷ'모양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인 맹사성고택. 정면 4칸 측면 3칸의 소박한 'ㄷ'모양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 그런데 세종의 이 같은 업적에는 ‘황희’와 ‘맹사성’이라는 조선 최고의 재상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습니다. 이 가운데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인자하고 섬세한 성품에 공정한 일처리, 명확한 공사구분 그리고 청백리의 대명사로 오늘날까지 공직자의 표상이 되고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 겨울이 찾아오는 길목에서 맹사성의 고택 맹씨행단(孟氏杏壇)을 찾았습니다. 맹사행단은 국내 민간주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사적 109호로 지정돼 보호 중입니다.
 
맹씨행단의 입구.
▲맹사성고택의 입구. 왼쪽 현수막이 걸린 곳은 문화해설사의 집

맹사성 고택의 문화해설사의 집 단풍.
▲맹사성고택 문화해설사의 집 단풍
 
 맹사성고택의 솟을대문. 고려무신 최영장군이 지어 손녀사위인 맹사성에게 전해졌다.
▲맹사성고택의 솟을대문, 고려무신 최영 장군이 지어 손녀사위인 맹사성에게 전해졌다
 
맹사성 고택의 담장아래로 650년된 쌍행수에서 떨어진 은행나무잎이 쌓여있다.
▲맹사성고택의 돌담 아래로 650년된 쌍행수에서 떨어진 은행나무잎이 쌓여 있다
 
맹사성고택의 대청마루. 문을 들어올려 넓은 강학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맹사성고택의 대청마루1, 문을 들어올려 넓은 강학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맹사성고택의 대청마루2.
▲맹사성고택의 대청마루2
 
맹씨행단의 솟을대문. ▲맹유·맹희도·맹사성 3부자를 모신 세덕사(世德祠), 고택 오른쪽 뒤편에 별도 담장으로 구획돼 있다
 
맹사성이 직접 심었다는 수령 650여 년의 은행나무 역시 공자가 은행나무에서 제자를 가르친 것처럼 유학적 기풍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마다 끊임없이 은행이 열리는데 지금도 가지마다 열매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맹사성고택의 쌍행수. 오른쪽 암나무에는 650년 수령에도 은행열매가 가득하다.
▲맹사성고택의 쌍행수, 오른쪽 암나무에는 650년 수령에도 은행열매가 가득하다
 
맹사성고택의 은행나무 열매.
▲맹사성고택의 은행나무 열매
 
맹씨행단은 주인의 성품만큼이나 아늑함과 편안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행단을 둘러보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맹사성은 비가 새는 집에 살 정도의 가난한 살림으로 ‘청백리’ 별칭이 붙었는데 이처럼 큰 대지(7851㎡)에 기와집이라니… 그동안 알려진 사실이 과장된 건 아닐까요?
 
맹사성고택의 뒷마당. 기와를 이용해 만든 굴뚝이 주변과조화를 이루고 있다. ▲맹사성고택의 뒷마당, 기와를 이용해 만든 굴뚝이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돌담으로 둘러처진 맹사성고택이 소나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돌담으로 둘러처진 맹사성고택이 소나무 숲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맹사성고택에 심어진 소나무가 눈길을 끌고 있다.
▲맹사성고택 안에 심어진 소나무가 눈길을 끌고 있다.
 
의문은 최영 장군과 맹사성의 관계에서 풀립니다. 맹사성의 조부 맹유는 최영 장군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최영이 낮잠을 자다 짙은 안개 속에 용 한 마리가 배나무에서 승천하는 꿈을 꾸고 깨었는데, 밖으로 나가보니 그때 어린 맹사성이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고 있었다고 합니다. 맹사성의 범상치 않은 인물됨을 알아본 최영은 맹유를 찾아가 자신의 손녀딸과 맹사성의 혼약을 맺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을 손녀사위 맹사성에게 물려주고 후손들이 대대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조선 이씨왕조의 입장에서 맹사성은 본가와 처가 모두 조선 개국을 반대한 반역자의 집안이고, 맹사성의 입장에서는 이씨왕조는 조부와 처조부 모두를 희생시킨 원수인데 관리로 출사라니 “선비의 절개를 끊은 것은 아닌가?”라는 점입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역성혁명을 통해 최영 장군을 비롯해 수많은 고려 충신을 죽이고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맹사성의 조부 맹유 역시 ‘두문동 72현’의 일원으로 은거하다 불타 죽은 고려의 충신으로 알려졌습니다. 함께 두문동에 머물던 아버지 맹희도는 관직을 버리고 아산에서 금곡서원을 세워 평생 후학을 길렀습니다.
 
맹사성 역시 27세인 1386년(우왕 12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고려의 관료가 되었지만, 조선 건국 과정에서 관직을 버립니다. 하지만, 그에게 출사를 종용한 것은 다름 아닌 부친 맹희도 였습니다. 오직 백성을 바라봐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오랜 시간 자신의 처신을 고민한 맹사성은 결국 부질없이 죽거나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한 부정한 삶 대신 철저히 백성의 입장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의 청빈과 겸손 위민의 정치 행적이 이 같은 결단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맹사성 황희와 권진 삼정승이 느티나무를 심고 국사를 논했다는 구괴정. 고불맹사성기념관 제공
▲맹사성·황희·권진 삼정승이 느티나무 3그루씩 심고 국사를 논했다는 구괴정(고불맹사성기념관 제공) 
 
맹사성의 출사는 인재난에 허덕이던 이성계에게 연좌제는 생각지도 못할 단비였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요직을 거치며 청렴하고 강직한 공직생활로 신뢰와 덕망을 쌓았습니다. 그가 사헌부 대사헌시절에는 태종의 부마이자 영의정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을 국문했다가 왕실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죽음 일보 직전까지 몰렸지만, 맹사성은 지조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비가 새는 초라한 집은 청백리로서 맹사성의 이미지를 대표합니다. 오직 급료만으로 생활한 그는 비만 오면 집안 여기저기에서 빗물 새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이러한 집조차 갖지 못한 백성들을 안타깝고 생각하고 오히려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맹사성이 타고 다녔다는 검은소의 무덤인 흑기총(黑麒塚)도 그의 성품을 말해줍니다. 맹사성이 타고 다니던 검은소는 그가 죽자 사흘을 먹지 않고 울부짖다 함께 죽어 감동한 사람들이 묘 아래 묻어 주고 흑기총으로 부르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나들이를 가는 맹사성의 모습을 재현했다.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나들이를 가는 맹사성의 모습을 재현했다
 
벼슬이 자신보다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항상 복장을 갖춰 예의를 다해 맞이하고, 손님에게는 신분 고하에 관계없이 문밖에서 맞이하고 반드시 상석을 내줄 정도로 겸손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맹사성의 인물됨은 야사와 각종 기록을 통해 끊임이 없으며 좌의정까지만 올랐는데도 수많은 영의정들을 제쳐두고 조선 최고 재상의 반열에 올라있습니다.
 
1435년(세종 17년) 76세의 고령으로 조정에서 물러난 맹사성은 낙향해 소박한 노후를 보내다 3년 뒤 7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둡니다. 그가 낙향하자 세종은 보름마다 맹씨행단에 관리를 보내 그에게 대소국사의 조언을 얻었다 합니다.

신생국 조선의 기틀을 잡고 세종시대 황금기를 펼치는데 누구보다 공헌한 맹사성의 청백리 정신은 지금까지 공직자에게 바른 자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국민을 위한다며 뒤로는 엉뚱한 욕심을 부리는 정치인들에게도 따끔한 일침을 주고 있습니다.
 
맹사성고택 맞은편의 '고불맹사성기념관'.
▲맹사성고택 맞은편의 '고불맹사성기념관'


신창맹씨의 각종 비문을 모아 놓은 맹씨비림. 맹사성고택 입구에 있다. ▲신창맹씨의 각종 비문을 모아 놓은 맹씨비림1, 맹사성고택 입구에 있다
 
맹씨비림2.
▲맹씨비림2
 
맹씨행단은 최근 기념관이 생기고 주차장 등 주변이 정비됐습니다. 후손들의 거주 공간도 정비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맹씨행단을 찾아 주변의 경치도 살피고 ‘맹사성정신’을 느껴보심은 어떨까요?
 
맹사성고택 마을의 돌담장.
▲맹사성고택 마을의 돌담장
 
맹사성고택 마을의 초겨울 단풍.
▲맹사성고택 마을의 초겨울 단풍이 돌담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시인 김남주)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시인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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