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입학하던 50여 년 전, 왼쪽 가슴에 흰 수건을 달고 엄마를 따라 학교에 갔다. 내 또래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양복을 입은 교장선생님이 단상에 올라섰다. 아이들이 반별로 다시 자리를 잡았다. 교장선생님의 연설은 그때부터 지루함의 상징이 되었다. 그 1학년에서 나는 열몇 번째 반에 배정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담임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복도는 삐걱거렸고 교실은 60명이 넘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지루한 나의 초등학교시절이 열렸다. 그때는 ‘국민’학교라 불렸고 우리는 베이비부머세대였다. 학생 수가 너무 많아 교실이 부족했다. 나는 아침에 학교에 가기도 했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등교하기도 했다. 2부제 수업이었다.
▲아련하게 보이는 초등학교 정문
고즈넉한 시골길을 지나다 (광성)초등학교 근처에서 걸음을 멈췄다.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다 이내 사라졌다. 교문 양쪽 길에 은행나무가 있었다. 오후 네 시, 아직 새들이 깃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는데, 나무이파리 속으로 새들이 모여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은 대부분 뭉개졌다.
▲닫힌 교정
학교 정문은 닫혀 있었다. 폐교된 운동장엔 풀들이 가득했다. 단층으로 된 나지막한 교실 건물은 나무와 키가 엇비슷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이 서 있는 근처 계단에서는 금방이라도 아이들이 교실 문을 박차고 나올 것 같았다.
학교 건물 위쪽으로 ‘신바람 어울림 꿈’이란 글이 있다. 신바람 나게 서로 어울려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신바람 어울림 꿈으로 공부했던 아이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을까. 저 글을 붙일 때 아이들의 꿈을 위해 계획하고 고민했던 열정적인 선생님들도 있었을 텐데, 단상 근처 홀로 서 있는 깃대가 왠지 쓸쓸하다. 태극깃발이나 학교깃발이 멋지게 흔들릴 때마다 중심이 되었던 깃대. 바람이 잠시 깃대 주변을 기웃거리다 허전히 돌아가는 것 같다.
▲게시판자리를 대신한 풀들
학교일정을 알리는 교문 앞 게시판 틈으로는 풀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다른 활용 없이 학교는 아이들이 빠져나간 그때 그 시간 그대로 머물고 있는 것일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6년은 너무 길고 지루했다. 2부제 수업으로 오후에 학교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침에 갈 때 좋았던 건 또 아니다. 아침은 잠이 덜 깬 상태로 몽롱했고, 오후엔 나른했다. 공부가 썩 재미있지도 않았다. 콩나물교실에서 나는 선생님과 친구들한테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다. 어릴 땐 키 순서대로 앞줄에서 두세 번째 줄 언저리에 앉았다. 나는 있는 듯 없는 아이였다.
도시의 바글바글한 시멘트교실이 아닌, 자연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시골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어땠을까. 눈을 맞춰주는 선생님과 사는 형편이 엇비슷한 동무들, 계절마다 감탄을 자아내는 자연이 어쩌면 안으로 웅크려들던 내 마음을 열게 했을지도. 그렇게 형성된 성격은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 내게 조금은 유연하고 말랑말랑한 힘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돌아가는 길, 아담한 마을이 보인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교실에 넘쳐나던 아이들은 점점 줄어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혹은 ‘둘도 많다’던 출산장려정책의 표어가 무색해졌다. 뽕나무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실감난다. 10월. 태풍 ‘미탁’이 지나간 맑은 하늘. 이때쯤이면 가을운동회로 학교가 들썩였을 계절이다. 은행나무에 모인 새들이 여전히 짹짹거리고, 학교는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