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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윤봉길 의사 사적지 저한당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청년

2019.06.25(화) 11:47:32 | 도희 (이메일주소:ass1379@hanmail.net
               	ass137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윤봉길의사사적지저한당 1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가면 윤봉길 의사님께서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까지 사셨던 '저한당'이 있다. 윤의사님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으로 23살의 나이에 부모님과 처자식을 이곳에 남겨두고 중국 상하이로 독립운동 하러 가셨던 분이다. 이곳 저한당 이름의 뜻은 "윤의사님께서 나라를 위기에서 건지다"는 뜻으로 직접 당호를 지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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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당 사랑방에 있는 윤의사님의 사진

윤의사님은 저한당에서 조금 떨어진 광현당에서 태어나셨지만 4살 때 조부님을 따라 이곳으로 이사를 하셨다. 윤의사는 5남 2녀 중에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10살 되던 해에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이 가르치는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하여 스스로 자퇴를 했다. 그리고 오치서숙에 들어가 한학과 사서삼경을 공부하여 16살때는 춘추시의회에서 장원을 하기도 하셨다. 스승은 더 이상 나한테 배울께 없다 더 큰 학문을 하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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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세 살의 윤의사님께서 사셨던 이곳에 가족을 두고 머나먼 중국 상하이로 떠날 때 심정은 어떠셨을까? 마루에서 놀던 아들을 품에 한 번 안아보고, 부엌에서 일하던 아내 배용순 여사에게 차마 이별의 말을 못 하고 대신 물 한 그릇을 떠 달라고 하셨다.
 
윤봉길의사사적지저한당 4

고 배용순 여사는 윤의사님이 떠난 후에 혹시 찾아올까 봐 70 평생을 먼 신작로를 바라보며 기다리셨다고 한다. 시부모를 모시고 남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남편을 평생 기다렸을 이 터전에서 여인의 한 많은 삶이 넋이 되어 떠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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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 석 자를 남긴다고 한다. 인간은 태어나 어떻게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의로운 죽음은 영원히 후세에 기억되는 것을 윤의사님에게서 배운다. 윤의사님은 중국으로 독립운동 하러 가기 전에 이곳 사랑방에서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당을 열고 주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그리고 피폐했던 농촌 부흥을 위해 여러 방면에 심혈을 기울이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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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사님은 스물다섯 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조국을 위해 불꽃 같은 삶을 사셨다. 충의사 윤봉길 의사님 유품이 있는 기념관에 가면 윤의사님께서 중국 홍커우공원 천장절 기념식 행사장에서 거사를 하기 전 이틀 전에 어머님께 쓴 유서가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부모, 처자식을 버리고서라도 조국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긴 유서를 보면 가슴이 절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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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세 살의 청년 윤봉길 의사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가셨지만 영원히 사는 방법인 의로운 죽음을 선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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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어록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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