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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5,000년의 역사를 한눈에 보는 독립기념관 겨례의 역사

2019.01.06(일) 19:30:33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역사는 반복되기도 하고 밝고 어둠이 차례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한글을 쓰고 있는 한민족(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니겠지만)은 여전히 이 땅에서 삶의 영위하고 후대에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주고 있다. 기록이 있어서 기억하는 역사도 있지만 기록이 없어서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도 있다. 그 큰 흐름 속에 군주나 왕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힘들이 모여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이어져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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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위대한 군주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그 시대에 유능한 인재나 신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 오바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냥 수많은 직업 중에 대통령이라는 것을 했을 뿐이고 누구나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오바마 케어를 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빈부의 격차는 있을 수 있지만 고통의 격차는 줄여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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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5,000년의 역사를 이렇게 다이내믹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곳은 독립기념관이 아닐까. 일본의 박물관이 얼마나 잘 만들어져 있는지 알기에 한국의 박물관의 수준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독립기념관 겨레의 뿌리관은 일본 못지않게 잘 만들어져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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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족장이 나오기 시작한 때부터 고인돌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고인돌의 종류는 탁자식과 바둑판식으로 구분이 된다. 땅 위에 기둥 역할을 하는 고인돌을 세운 후 커다란 돌을 올려놓은 것이 탁자식이고 땅 속에 사각형으로 돌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작은 잡석 등을 깔고 커다란 돌을 올려놓은 것이 바둑판식이다. 비래동 고인돌은 둘 다 바둑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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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선사시대 인류는 자신의 생활상과 소망을 바위그림으로 표현하였는데 농경과 사냥과 관련한 신성한 것을 표시한 것이었다. 울산광역시 율주군 두둥면 천전리 태화강 상류에 가면 천전리 바위그림이 있는데 이는 진흥왕의 즉위와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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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해 한국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은 것으로 역사를 배워왔지만 한반도에는 약 70만 년 전부터 시작된 구석기 문화(뗀석기)가 있었으며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그 제작기법이 어떠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석기 문화를 입증하였다. 그리고 간석기 문화(신석기)는 대략 기원전 8,00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 식량 등을 저장하면서 집단 문화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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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전쟁에서 탱크가 그런 역할을 하지만 오랜 시간 말을 이용해 군대 편성을 한 기마무사 부대는 가장 강한 전력이기도 했다. 반지의 제왕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중기갑병의 위력은 어마어마하다.  철갑군이 있다는 것은 이들도 유명한 중장기병이 있다는 의미이며 고구려를 지탱하는 전력이기도 했다. 마대가 말을 타고 몸을 돌려 화살을 쏘았던 방법을 파르티안 기사법인데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의 벽화를 보면 무사가 말을 달리면서 뒤로 몸을 틀어 각궁의 줄을 귀까지 당기고 짐승을 겨누어 쏘는 모습이 바로 파르티안 기사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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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는 익산을 대표하는 역사의 흔적이다. 미륵불이 용으로 변해 내려온다는 세상에서 가장 큰 사찰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되었다. 오래된 황량한 절터에는 규모로 보는 사람을 압도할 만큼 큰 탑이 있었다. 이 탑을 두고 7층 설과 9층 설이 분분했다. 돌탑의 노반석이 발견되면서 탑의 규모가 밝혀졌는데 노반석을 기준으로 복원해본 결과 9층과 맞아떨어진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는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았다. 장은 마를 캐어 팔아 생업을 삼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 이름은 서동이었다." -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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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게 공간을 조성해둔 것 같은 이곳은 해상왕 장보고의 흔적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장보고(張保皐)는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활약했던 무장이자 무역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년일과 출생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서남해안의 해도(海島) 출신으로, 20대에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 지역에서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다 무역은 아시아뿐만이 아니라 지중해, 대서양, 태평양을 넘어갔던 열강들에게도 중요했고 지금도 중요하다.  10세기경 이탈리아 남부와 중동 지역에 여러 무역 거점을 마련하였다. 피사는 12세기 이후 전성기를 맞이한 이베리아 반도의 지중해 무역은 대표적인 서양의 해상무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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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지나가기만 하는 합천의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있는데 예전에 잠시 공개하였을 때 본 기억이 난다.  1011년에 새긴 초조대장경이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1236년 몽골이 침입하자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호국불교적인 의미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251년에 다시 완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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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를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이며 한반도의 최초의 국가라고 부르는 나라는 고조선이다. 수많은 왕검의 역사 중 우리는 단군왕검을 가장 많이 기억한다. 그는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하였는데 이때 많은 중계무역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많으며 다루기가 쉬워서 어디든 사용하는 철을 사용하는 철기문화로 진입을 하게 된다. 

이곳에 재현된 역사의 흔적들은 상당히 잘 만들어진 편이다. 그리고 흐름을 따라 걷다 보면 쉽게 한반도에 내려온 역사의 흔적을 플로우처럼 담아갈 수 있다. 

책으로만 보는 것보다 이렇게 직접 보는 것도 역사인식에 무척 많은 도움이 된다. 보지 않고 상상만으로 기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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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마다 나오는 것이 다르고 나라마다 주요 생산품도 모두 다르다. 허생전의 허생처럼 매점매석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장보고가 살았을 당시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신라에 오기도 하며 주요 항구는 울산항, 당항성이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것은 9세기 후반으로 당 ~ 신라 ~ 일본의 해상 무역 장악하였으며 신라의 수출품은 당에 금과 은 등 세공품, 인삼 등과 일본 에는 금속제품, 직물, 불교 및 유교 문화 등으로 당나라에서 수입한 물품을 일본에 다시 팔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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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장 많이 기억하는 역사의 조각은 바로 조선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에 기반을 두고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특히 기록유산이 많이 남아 있고 당대의 인재들이 역사를 재정비하기도 하고 실용적인 서적도 많이 나왔다. 지금 자원의 집중이 불균형을 이 룰 정도로 심한 서울은 바람의 흐름과 한강이라는 젖줄, 도시의 성곽, 도시계획상의 큰길과 큰길을 모세혈관처럼 이어주는 작은 길, 북촌과 남촌 등으로 잘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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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남해를 가면 공원이나 옥포해전, 칠천량 등 수많은 지역에 거북선이 있지만 생각보다 디테일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곳에 만들어진 거북선은 크기는 작지만 디테일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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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생각해보면 조언을 구하는 것이나 조언을 하는 것은 모두 정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실된 마음으로 조언을 해주고 잘 인도하되, 그래도 할 수 없다면 그만둘 일이지, 스스로 욕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다. 역사 속에서 숨은 메시지를 읽을 때도 그렇다.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겨레의 역사가 마치 키워드처럼 표현되어 있다.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함께 도를 향해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도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입장을 같이 할 수는 없다. 입장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른 판단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한다. 무릇 세상일이 그렇지만 여전히 나아가는 사람과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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