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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예산 옥병계에 가면 최치원의 세이암이 있다

2018.05.26(토) 14:32:38 | 도희 (이메일주소:ass1379@hanmail.net
               	ass137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예산옥병계에가면최치원의세이암이있다 1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 있는 옥병계는 관어대에 이어 제2곡으로 가야구곡은 가야산에서 흘러내려 온 계곡의 아홉굽이 경치를 말한다. 그는 세상일이 어수선하고 복잡할 때 옥계리 저수지 옥병계에 가면 고운선생의 흔적을 만난다. 신라말 귀족들의 타락으로 어수선한 세상을 한탄하며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을 떠돌며 유람하며 지냈다. 고운은 가야산에 들어가기 전 이곳을 지나면서 옥계계곡에서 옥같이 맑은 물을 보고 병풍비위에 세이암 글자를 세기고 가신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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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료들과 문인들이 즐겨 찾았던 곳, 옥과 같이 티없이 맑은 물이 흘렀다고 하여 붙인 옥병계 저수지가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 있다. 18세기 조선 시대에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었던 강문팔 학사 병계 윤봉구 선생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하늘과 산, 호수가 옥빛을 이루어 하나가 된 듯한 옥계리 저수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주자의 무이국고(無李九曲)을 본따서 가야구곡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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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쓴 洗耳巖(세이암) 글씨가 암각회 되어 있고 '고운'이라는 호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들어와서도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펄쳐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는 타락한 진골 귀족의 부패와 비방 세력들의 반란에 권력과 세상을 등지고 이곳 가야산에 들면서 혼탁한 세상에서 들었던 잡다한 말들을 잊기 위해 옥계천에 귀를 씻고 글자를 바위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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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이라는 최치원의 호가 세이암 좌측 아래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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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임금이 은자와 소부에게 작위를 내리겠다는 말을 듣고 기산(중국 하남성 동봉현의 남동쪽)의 영수에서 귀를 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동의 세이암에도 고운 선생의 세이암이 있지만, 그쪽의 가야산인지 충남의 가야산에서 정말 귀를 씻고 가야산에 들어 가셨는지는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하다. 하지만  문헌상의 기록에 의하면 최치원께서 당나라로 오가는 길목으로 삼았을 충남의 내포지역 특성상 배를 타고 가는 항구로 여겼을 가능성이 이쪽이 더 유리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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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선생외에도 세인의 관심을 끄는 암각화 글자들이 시선을 끈다. 죽천 김진규 선생의 욕병계, 청송 성수침의 수재대 등 여러 사람들이 쓴 글씨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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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많은 문인, 관료들이 즐겨찾던 이곳은 수직으로 병풍바위처럼 흘러내려 '병풍바위'라고도 불리웠다. 티 없이 맑은 물이 바위 아래로 내천에 흘러 '옥계'라고 명명하고 마을 이름도 옥계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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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은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기암이라고도 불리는 정자는 옛날에는 바위 위에 정자가 있었고 덕산현의 관기가 바위 위 강당에서 놀다가 실수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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